완벽한 때는 없고, 있다 한들 그 순간에 알 리가 없지.
눅눅한 튀김만큼 속상한 일이 없다.
튀긴 지 오래되어 눅눅한 것이면
다시 살짝 튀겨내면 복구가 되지만,
소스를 부어 눅눅해진 튀김은
비가역적 손상을 입고
더 이상 튀김으로서의 제 몫을 하지 못한다.
더욱이 소스를 붓는 일은 실수가 아니라는 점이
더 속이 상하게 한다.
소스를 부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튀김옷에 소스가 베어 들어 부드러움과 바삭함을 모두 즐기겠다."
맞는 말이다. 음식이 소량이라면 나도 부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다만, 부은 다음 적정한 시기를 놓쳐버린다면 이도 저도 안되고 단점밖에 남지 않은 안타까운 음식이 되어버린다는 게 문제지.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다.
결국 인생은 타이밍이다. 눅눅한 튀김을 먹지 않으려면,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더 잘해보려고 하는 일이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일이
신중하게 상황을 바라본 일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뭔가를 잘하고 싶으면, 일단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해봐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것저것 따지다가 보면 의욕이 상실되기 마련이며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위한 완벽한 타이밍은 없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 완벽한 타이밍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 완벽하다고 생각할 확률은 더더욱 낮다.
미루지 말고 일단 그냥 하고,
하다가 망하면 다시 하고,
그래도 안되면 때려치우면 된다.
아, '내 길이 아닌가?' 하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눅눅한 튀김을 먹지 말라는 말이다.
"소스를 부은 직후에 그냥 먹으면 찍먹이랑 뭐가 달라?"
"네가 요리사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먹다 보면 완벽한 순간이 오겠지."
나는 시행착오를 사랑한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으니 엉덩이가 가볍다.
안될 이유가 없으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몇 번 깨지고 나면 '내 길이 아닌가?' 하고 보내준다.
그러다 또 누구 손에 끌려가서 방법을 찾기도,
영영 그 녀석과는 겸상하지 않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얻어낸 내 삶의 일부가 한가득,
내 삶의 넓이와 깊이가 점점 확장된다.
어떤 새로운 경험이 있을까.
새로운 배움이 있을까.
실패가 있을까. 설레는 인생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겠지.
결국엔 내 자유로운 삶을 포기하고 살아가야겠지.
하지만, 그 포기가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다른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해서 놓아야 하는 것이라면
난 언제던 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을 생각이 있다.
손에 새로운 것을 쥐려면,
내 손에 있는 것들을 놓아야 한다.
그리고, 한번 쥐었던 것은
내 손이 질감과 촉감, 그리고 무게와 쓰임새를 기억하기에
어렵지 않게 다시 쥘 수 있다.
그렇기에 난 새로이 손에 쥐는 것도 망설이지 않으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것 또한 아쉽지 않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인가?
고통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 반대의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말과 같다.
내가 직접 경험을 했건, 간접 경험을 했건 말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고통의 불연속이겠다.
사이사이에 고통스럽지 않은 게 분명히 있으니까.
불행하다고 말하는 거 아냐.
직장 다니다가 주말에 쉬면
배가 고프다가 밥 먹으면
새로운 사람과 만나면
친구과 싸우고 타협점을 찾으면
등등 결국 고통을 주는 것은 양면성이 있어서
그걸 뒤집으면 행복을 주건
고통이 사라지건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해내신다.
사실, 무작정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걸 잘 알아요.
실패해도 다음 기회가 없는 것이라면, 무작정 시도해 봐도 좋죠. 내 몸만 성하다면, 개인적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시도해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기회가 한 번인 일도 있어요.
예를 들면 사람 간의 관계죠.
나는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면 한 없이 쪼그라들고 맙니다.
내가 사람을 대하는 일은 앞으로 무수히 많을 것이지만,
내가 이 사람에게 대하는 첫 모습이
곧 마지막 모습이 되어버린다면,
기회란 다시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한 순간의 실수로,
눅눅해진 튀김을 씹고 싶지는 않아서요.
2025. 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