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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보니

익숙한 장면들이 보입니다.

by 박승연

약속이 끝나고 노량진으로 향했습니다.

수많은 청춘들이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상경하는 장소인 노량진은

내가 머물었던 시간은 없지만,


내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있던 곳이기에

왜인지 항상 기시감이 드는 장소이죠.


노량진에 약속이 있던 것은 아닙니다.

이유 없이 새벽에 노량진에 가보고 싶었어요.


노량진으로 가던 도중 생각에 잠겨 고속도로 진출입로를 놓쳤습니다.

서울 근처에서는 길을 놓치면 생각보다 꽤 돌아가는 길이 잦습니다.


김이 새 버려 그만 내비게이션을 꺼버리고 맙니다.

나는 가끔 내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는 과정을 즐깁니다.


의도치 않게 과거에 즐겼던 놀이가 시작된 것이죠.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타다가 익숙한 이름이 보입니다.


'양재 ic'


양재라는 지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생각보다 오래전입니다.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 청주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약속 없이 목적 없이 서울 나들이를 계획하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으면

커튼 사이로 은은하게 비추는 햇살이 노곤한 기분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잠에 들곤 합니다.


탈것 안에서 자는 행위를 즐깁니다.

그 탈것이 기차, 버스, 배 어떤 것이건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적당한 소음과

반복적인 흔들림이


마치 요람 안에 들어간 영아로 돌아간 것 마냥 나를 잠들게 합니다.


그래서 종착지가 정해진 여정에서는 기차보다는 버스가 좋습니다.

기차에서는 편히 잠들기가 어려우니까요.


청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은 지루한 길의 연속입니다.

버스를 타건, 자가용을 운전하건 말이죠.


하지만, 버스 안에서의 나는 길이 지루하건 말건 상관이 없습니다.

반복적인 패턴이 나를 잠들게 하니까요.


반복적인 패턴이 깨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 패턴이 깨지는 순간이 항상 일치한다면 우연이라고 볼 수는 없겠죠.


버스가 기분 좋게 덜덜거리면서 주행을 하다가도


갑자기 브레이크와 엑셀을 번갈아 밟는 기사님의 패턴이 깨지는 순간이면

살짝 잠에서 깨어 창밖을 내다봅니다.


십중팔구 '양재 ic' 인근입니다.


양재라는 지명을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양재라는 곳을 목적지로 정하고 갈 일은 잘 없습니다.


거주지를 옮겨 서울에 살게 되기 전까지는 양재에 뭐가 있는지

무엇이 유명한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양재라는 곳은 영원히 나에게 서울이 시작되는 장소로 남아있겠죠.


그렇게 익숙한 길을 따라 돌아다니다 보니 결국엔 적당히 차를 세울 곳을 찾습니다.

서울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차를 세우기가 어려우니 결국 익숙한 동네로 갑니다.


일원동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휴직 전에 마음이 심란할 때면 아무 생각 없이 차를 가지고 서울의 모르는 곳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그런 짧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차 안에 앉아서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마치 과거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습니다.


러닝이라는 취미를 가지기 이전에는 항상 한강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각종 다리를 건널 때마다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곤 했습니다.


그거 촌놈의 특징 중 하나라죠.

서울 사람들은 열차의 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손안에 있는 작은 창을 바라보기에도 바쁩니다.


그러면서 항상 했던 생각이


'나중에 이 다리를 내 발로 건너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요, 지난 휴가 때 여러 다리를 직접

내 발로 뛰어보니 꽤나 재미있었습니다.


하나씩 퀘스트를 해결하듯이 모든 다리를 상행과 하행으로 건너가 보는 것이

나의 실현 가능한 목표 중 하나입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원래 이번 나들이에서는 목표가 하나 있었습니다.

21km 하프 코스를 뛰려고 이런저런 계획을 잘해놨었는데

최근에 무릎 부상으로 인해서 러닝 금지를 당하여 이번 일정에서는

아쉽게도 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 더 어렸던 과거를 회상해 보면

'무릎이 아프지 않으면 괜찮겠지' 하며 달리기를 했을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조금은 성장하지 않았냐는 자각을 했습니다.


좋아하니까, 오히려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니까요.


오래오래 즐기려고 마음먹은 취미를

지금 당장이 아쉽다고 떼를 쓰는 아이처럼 굴어

흥미를 잃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2주가량 러닝을 못하니 몸이 여간 쑤시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3주는 채우고, 살살 뛰어볼 계획입니다.

한번 사용하고 봉인해 둔 '굴비' 러닝화를 틈날 때마다 흘겨보면서 말이죠.


다음 주에는 욕심내지 않고 630 페이스로 30분 정도 달려볼 계획입니다.

이제는 무릎에 테이핑을 하지 않고 걸어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데,


뛰었을 경우에는 또 모르죠. 무릎이 제발 삐걱 거리 지를 않기를 바라며

애꿎은 무릎을 만지작거립니다. 주인 잘못 만나 갑자기 몇 개월간 혹사당한

녀석은 내가 미울 겁니다.


평생을 안 뛰던 사람이 미쳐가지고 5개월 만에 500km를 뛰었으니

한번 퍼질 때도 되긴 했습니다.


오랜만에 안경을 꺼내 썼습니다.


안경이라는 녀석은 나에게 애증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직장인이 되고 난 이후까지

쓰다가 안경을 벗어도 되는 상태가 된 지는 채 3년이 안 되었는데요.


안경을 쓰지 않아도 잘 보이는 눈을 가졌지만,

나는 안경을 자주 씁니다. 부끄러워서 이유는 못 밝히지만

그 이유 때문에 애증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안경을 벗으려고 노력했건만, 다시 안경을 찾게 되는 나를 보면서

안경이 좋기도 밉기도 합니다. 양가감정이건 애증이건 뭐라고 설명해도

다 맞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에 따라 안경을 벗을 수도 있고

쓸 수도 있는 선택의 여지가 생겼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기쁜 일임에 분명합니다.


개인의 자유 의지를 제한하는 것만큼 의욕 떨어지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렇잖아요. 공부하려고 딱 마음먹었는데,

뒤에서 누가 '공부해'라고 잔소리를 해버리면

괜한 심술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마냥


사람에게 있어 자신이 자유롭고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인

'자율성'을 지니고 있음은 굉장한 이점입니다.


물론, 뭐 선택지가 무한대가 되어버린다면

여러 선택지를 고르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괴로움이 될 수도 있지만요.


그 사람들도 이지선다는 괘념치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최근 나에게 생긴 변화 중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도

횡단보도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도 다 크건 작건

괴로움을 수반하는 일이었는데요.


요즘엔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보거나

별것 아닌 것에 대한 생각을 하거나

멍을 때리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차분해진 걸까요. 닳아서 둥글어진 것일까요.

사람은 원래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고 적응하는 동물이지만,

이렇게 자신의 변화를 자각하는 순간은 꽤 흥미롭습니다.


나는 나중에 또 어떤 변화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물이 자연스럽게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도 자연스럽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변화들이 꽤나 마음에 듭니다.


시간은 비용이고, 그 비용이 나타내는 효용이 가치롭다 여겨지기에

만족스러운 소비생활을 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듭니다.


이렇게 '여유'를 배우고 다루고 있습니다.

익숙해진다면 좋은 무기가 될 듯합니다. 조급함은 일을 그르치게 하는

요인 중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니까요.


물론, 설계된 조급함도 가끔 필요할 때가 있죠.

시간은 무한히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 없이 기다리다가는

적절한 시기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요 뭐든지 과하면 모자람만 못합니다.


최근에 들었던 말 중에서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알았을 때, 뭔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적당함을 추구하는 나라는 사람에게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는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떤 것에 너무 심취하거나,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입니다.

비용이라는 것은 한정적인데, 한쪽 방향으로 파고들다 보면 결국

적절한 분배의 어려움을 느끼는 딜레마 시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적당함을 느끼면 템포를 조절하고, 어느 정도까지 비용을 투자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점이 오는데요.


중용을 읽어본 적이 없는 이과생이 감히 중용의 의미를 헤아려보건대,

과유불급, 중용,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다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요.


나는 저 말들을 좋아하고, 저 말들을 마음속 어디엔가 새기면서 살아갑니다.


평범하고, 적당한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것입니다.

평범과 적당은 항상 의식을 하면서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을 해야지 도달할 수 있는 경 지니 까요.


안정평형점에 놓인 점 입자가 어느 정도의 외력을 받아도 평형점에 돌아오는 것 마냥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적당함이 아니라


불안정평형점에 놓인 점 입자가 부단히 외력으로부터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해야 평형점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는 정도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그 적당함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죠.

불안정평형점 인근의 위치에서의 곡률을 낮추는 과정이

내 인생의 목표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적당함이 좋다고 항상 흑과 백 사이의 회색지대에 나를 놓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댓값이 중간이라는 것이지 상황에 따라서는


조금 급해도 혹은 조금 느려도 괜찮은 것이죠.

상황에 따라서 그 빠르기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각각의 상황들을 다 생각해 봤을 때 결국에는 그 평균이

중간에 오도록 위치시키는 작업이


내가 평생에 걸쳐 해나가야 하는 과제입니다.


단기적으로는

휴가 나가서 실컷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즐겼으면,

돌아와서는 꾸준히 식단을 해줘야 하고요.


장기적으로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지 파악하고

불쾌의 제거가

쾌의 추구를 삶 속에서 이어 나갈 겁니다.


그래서 내일은 휴일이니까 아침에 운동하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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