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스물아홉이야 서른이 아니고.
98년생, 한국나이 28세 사회초년생 남성.
어, 어, 하다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2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손에 쥔 것에 만족하지 못함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내가 쥐고 있던 다른 것들을 놓았기에 가능한 것.
과연 내가 놓아버린 것들 보다 지금 쥐고 있는 것들이 더 가치로울까요?
늘 그렇듯 이런 질문들은 시간이 지나 봐야 가늠이 됩니다.
30대 초반의 내가 20대 후반의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살아내야만
한다는 부채감이 나를 누릅니다.
20대 초반에 그리고, 중반에 열심히 살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합니다.
남들 하는 만큼이 가시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고
각자의 삶마다의 사정이 있으니 기준이라는 것은 결국엔 나라는 사람의 내부에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항상 남습니다.
그래도 아쉬움이 있기에 발전이 있겠죠.
나는 20대를 보내는 이 시간에 또 다른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대학교에만 가면 인생이 끝나는지 알았고,
대학 시절에는 취직을 하면 인생이 끝나는지 알았습니다.
"나는 이 게임을 해봤어요."
어떤 넷플릭스 시리즈의 대사처럼, 몇 번 하다 보니 다음 페이즈에 어떨지
안 봐도 예상이 됩니다.
지금 나를 누르고 있는 과업과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도 지나고 보면 다
별 것이 아닌 것 마냥 미화가 될 것이고,
그때의 나에게는 또 그 시기에 맞는 문제가 있겠죠.
그래서 미래를 두려워하고, 어떤 문제가 나에게 다가올까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현재에 충실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나는 남들과 똑같은 길을 걷기 싫어하는, 개척자의 성향을 지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군대를 늦게 입대한다는 선택으로 유발되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얻고자 했던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나니 일종의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글의 첫 문장을 빌려와 볼게요.
98년생, 한국나이 28세 사회초년생 남성. 그리고, 병역 미필
생각보다 손해가 많았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이 담보되어 있으니 군대에서의
시간들이 크게 괴롭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버텨내기만 한다면 원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은
직장을 얻고 난 시점부터, 입대를 하기 전까지의 2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입니다.
언제 군대를 가야 할지 모르는 너무나도 불안한 사람이자.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을 한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미래를 가진 안정적인 사람.
이 양면적인 특성을 가지고 2년간의 시간을 보내보니
많은 기회들을 놓치지 않았는지 물음이 생깁니다.
스스로가 신분의 불안정성을 느끼니 뭔가를 시작하려 해도 망설여집니다.
"테니스를 배워볼까?"
"아.. 테니스는 무슨 테니스야 군대 가면 다 날아가는데 되었다 치우자."
"선생님~ 이번에 군청에 새로 오신 주무관님이 계시는데, 선생님 얘기를 했더니 관심을 보여서요~
혹시 만나시는 분 없으시면 소개팅 의향 있으실까요?"
"아... 주무관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직 병역이 해결이 안 되어서요ㅎㅎ..."
"아.. 선생님 98년생이라고 하셔서 당연히 다녀오신 줄 알았어요.
그럼 제가 한번 물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연락 두절)
이미 충북에 발령이 나서 직장을 다니고 있던 시점에
서울로 시험을 다시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렸습니다.
"아.. 이미 너무 늦었는데, 더 미뤘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내가 이번에 한 번에 성공을 한다고 하더라도 전역하면 29살인데... 그때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가 쉬울까?"
"내가 주변 인간관계와 내 삶을 다 포기하고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어쩌지?"
"과욕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같은 월급인데 과연 서울로 가는 게 맞나?"
매일같이 퇴근하고 밤 12시까지 공부를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저런 불안감과
나를 헷갈리게 하는 여러 상황들과 고민거리들이 나를 흔들어놓았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원하는 목적을 다 이루고,
최소한의 기회비용으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지만
만약 실패했다면 스스로에게 많이 실망했을까요?
나는 아직도 서울시교육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던 날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공업고등학교에서 목요일마다 4시간 순회를 괴산으로 나갔었습니다.
괴산**중학교에서 목요일 오전 4시간을 연강으로 했었는데,
2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이미 발표 시간인 10시는 넘었고
왜인지 컴퓨터는 그날따라 버벅거려 사람 속을 다 헤집어 놓았습니다.
교직원온라인채용 홈페이지에 로그인을 하고 합격 조회를 누르기 직전까지.
심장 소리가 이렇게 클 수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록 쿵쿵거리고
손발은 가만히 두지를 못하고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래 손바닥으로 모니터를 가리고 합격 조회를 하던 그 순간을 말이죠.
'합격'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긴장은 풀리고,
꼿꼿이 세워놓았던 등은 털썩 의자에 기대고
좋다는 기분보다는 '다행이다'라는 기분이 먼저 들었습니다.
22년도에 충북에 합격할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죠.
왜 달랐을까요? 뭐, 중요한 건 아닙니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2년간의 이중적인 신분이 나를 괴롭혔던 것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취업을 하기 전 까지는 '돈'에 대한 개념이 아주 없었습니다.
친구가 술값이 부족하다고 하면 턱턱 내줄 정도로 시원한 맛은 있었죠.
내가 부리는 여유는 계좌의 여유와는 반비례하는데 말이죠.
취업을 하기 전까지는 이런 핑계를 대곤 했었습니다.
"어차피 공부하느라 바쁜데, 돈까지 아끼면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어?"
음.. 저때는 엥겔지수가 프랑스인 뺨치게 높았죠.
주제에 맞지 않는 많은 경험을 한 게 이제와서는 도움이 되긴 했지만,
조금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지는 않았는지 의심이 듭니다.
취업을 하고 나서는 이런 핑계를 대었습니다.
"이제 나도 직장인인데, 친구들이나 부모님께 한턱 쏘기도 해야지."
문제는 '한'턱이면 괜찮은데, '여러'턱을 쏴서 문제였습니다.
취업을 하기 전에 몸에 배어있던 습관이 취업을 한다고 어디 가나요?
주제에 맞지 않는 시원시원한 소비습관은 내 지갑도 시원하게 만들었습니다.
1년을 근무하고 재임용을 준비할 때, 이런 핑계를 대었습니다.
"아니 일하면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데, 돈까지 어떻게 모아"
아이고 이제는 한숨이 나옵니다.
일하느라 시간이 없고, 퇴근하고 나면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을 텐데요.
소비습관을 고치기가 싫고, 스트레스를 관리할 방법을 고민하기 싫어
게으름을 피운 결과가 과소비를 유지하는 핑계가 되었습니다.
재임용을 합격하고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6개월간 이런 핑계를 대었습니다.
"이제 내가 목표한 것 다 이루고 군대 가는데, 반년정도는 괜찮잖아~"
이즈음 원래 친했던 친구와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내 소비습관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지만
월급 통제의 주체의 레임덕이 오는 바람에 결국 입대하기 전까지 개념 없이 살았습니다.
본격적인 돈에 대한 공부는 입대를 하고 시작되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생각보다 비는 시간이 많습니다.
나이를 먹고 늦게 와서일까요.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사실, 돈을 펑펑 쓰는 것만 제외하고는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2023년의 나는 누가 봐도 대단하다고 평가할 정도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았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고,
그걸 한번 더 하라고 하면 토 나올 정도로 끔찍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지금까지의 소비습관을 고찰하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돈'에 대한 공부였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지난날의 나를 몽둥이로 매타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과한 소비습관을 유지한 덕분에 수중에 여윳돈은
충분하지 않았고, 어쩌면 시도할 수 있었던 수많은 투자와
자산 증대의 기회는 다 날아가버렸죠.
하지만, 저는 목표한 것은 이루어내고 마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넘어질지언정 실패한 적은 없습니다.
절치부심의 각오로 지금까지의 못남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빡빡한 일정의 9개월을 보냈습니다.
돈에 대한 공부는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공부랑은 달랐습니다.
혼란스러웠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월급쟁이가 대한민국을 살아가기 위한
미래 계획은 단순하면서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잖아요. '교과서 위주로 예습 복습'
'꾸준한 유산소와 식단관리'
'충분한 수면과 스트레스관리'
이렇게 단순하게 방법을 말할 수 있을수록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개인마다 처해있는 상황이 다 다르고,
국가 간의 경제적인 상황에 따라서 개인의 자산관리도
다 방법이 달라지니까요.
군대를 떠나고 사회에 복귀한 시점으로부터
어떻게 자산을 관리하고,
가까운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대부분의 설계는 끝났습니다.
어차피 개인이 가용한 대출이나 자산은
가시권에 들어와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성향 자체가 그렇게 공격적인 편은 아니라
부동산을 마련하기 전 까지는 안정적으로 가려고 하니까요.
그럼 이제 돈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연애를 안 하게 된 지가 시간이 좀 지나다 보니
연애를 어떻게 시작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이제는 상대방과 연애를 한다는 것은 결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하는 일이죠.
20대 초반에는
"너 나랑 결혼할 거야"
"그럼~ 당연하지, 너 아니면 내가 누구랑 결혼해."
라는 공수표를 던지는 것이 사랑의 확인의 수단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결혼'이라는 말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주변에서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중가하고 있고,
다들 어디에선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하는 사람들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결혼을 하고 그런 모습들이 많이 보입니다.
언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너는 지금 만나고 있는 분이랑 언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어?"
"사실, 무슨 매체에서 묘사하듯이 아.. 이 사람이다 이런 건 없었고,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
아, 낭만이 살아있지 않나요.
상대의 조건을 보고 따지고 비교하고,
각도기와 줄자로 거실에 들어올 소파의 크기를 재는 듯한
이 결혼시장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던 나에게
저 말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렇잖아요. 결혼하기 위해서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를 하다가 보니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것.
비록 결혼이 나와 함께할 배우자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지라도,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기까지 하면 좋으니까요.
지금까지는 연애를 할 때 '결혼'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예정이니 심적인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병역을 해결하기 전과 후의 나는 아주 다르니까요.
27세, 미필, 직장인 남성
29세, 군필, 직장인 남성
7이 9로 바뀌고 미가 '군'으로 바뀌었더니
느낌이 확 달라집니다.
이런 말하면 웃기지만
집게다리가 떨어지고 딱 봐도 먹을 게 없어 보이는 '홍게'가
튼실한 집게다리에 빵빵한 배를 가진 '킹크랩'이 된 것 같네요.
(아 내가 적어놓고도 너무 웃긴데, 읽으시는 분들께 죄송합니다.)
이야기가 새서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오자면,
나는 상대방의 조건을 따지고 머리를 굴리는 연애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나와 앞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낼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상대의 배경도, 가정환경도 뭐 다 그 사람의 특징이라면 특징이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니까요.
결국 그렇다면, 내가 상대의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람만을 온전히 생각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내 조건이 괜찮아야 합니다.
결혼과 연애는 쌍방이라서, 한쪽이 마음에 든다고 성사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경제관념을 갖추고
급변하는 대한민국 경제에서 아웃되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랑이 밥 먹여 주지는 않으니까요.
배가 부르고, 비바람을 막아줄 보금자리는 있어야
타오르는 사랑이 식지 않을 테니까요.
곳간에서 인심이 나듯이
내가 곳간이 든든하다면, 상대의 단점이 있더라도
상대의 장점을 보고 만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코코 샤넬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마라. 그러나 명심해라, 당신은 외모로 판단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 말에 비해서 너무나 좋아하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죠.
다만, 사회적인 분위기나 타인의 생각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손해는 막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기준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가슴에 새기고 있는 말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외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상대의 조건을 보지 않고, 사람만을 보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내가 조건이 괜찮아야 합니다.
내 배우자는 나의 조건을 봐도 좋습니다.
내가 당신의 조건을 보지 않을 테니까요.
(와 누가 보면 내가 조건 좋은지 알겠다. 그런 건 없으세요)
명실상부한 20대 후반이 되니 고민이 참 많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반성도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경제적 준비, 사랑과 연애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내가 보내야 할 시간들이 많습니다.
나와 인스타그램 팔로잉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볼 수 있는
블로그에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 것은
다짐의 목적이 다분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