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휴대폰도 있었다.
[택배]
군부대로는 택배를 보낼 수 없다.
그래서 택배를 받으려면 일단 집으로 택배를 보낸 다음에
우체국 택배로 군부대 사서함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아주 비효율적이고
소위 말해 열받는다.
택배의 민족답게 쿠팡 딸깍 한 번이면
내일 아침에 문 앞에 도착해 있는 삶을 살다가
택배를 한번 시키면
세월아 네월아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 놓이니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웬걸? 쿠팡에서 사서함으로 배송을 시키면
군부대로 직송을 해준다는 정보를 들었다.
쿠팡에서 군부대 위치를 아니까 예외적으로 가능한
상황이라고 전달받았는데, 호기심이 생겼다.
'다른 기사님들께서도 군부대 위치를 알고 계시지 않을까?'
그래서 군부대 위치를 파악해서 주소를 쓰다 말고
부대번호를 기재하고 특이사항에
'위병소에 전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를 기재하였는데, 택배가 우주미아가 되어서
어디에 박혀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어딘가에는 내가 시킨 택배가 있을 텐데,
과연 내가 시킨 테이핑은 어디에 있을까.
[e북리더]
오늘 친구와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데
갑자기 친구가 운을 띄운다.
"네가 정말 좋아할 만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
부모님 말고는 나랑 가장 오래 붙어있던 친구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인데,
확신에 차서 저런 말을 하니 호기심이 동했다.
기대감에 차서 가방을 열었더니 전자책이 나온다.
분명히 내가 알던 전자책은 애기들 장난감같이
허술하고,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던
마감의 물건이었는데
내 눈에 보이는 그것은 오랜만에 내 소비욕구를 끓어올렸다.
마침 가방에 있던 책을 꺼내서 비교해 보며,
침이 마르도록 전자책을 칭찬을 했다.
"내가 휴대폰을 꺼내서 인스타 한번 들어가고, 카톡 한번 들어가는 게
결코 누가 연락을 와서가 아니라 습관이 된 거다. 이건 진짜 혁명이다."
결국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나는 신문물의 전자책에 마음을 잔뜩 빼앗기고 말았다.
[카페]
가보고 싶었던 카페가 있었다.
[갈곳, 가 본 곳]에서 설명했듯이 나는 가보고 싶은 장소를 일단
지도에 저장해 놓고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릴 일이 있으면 방문하는
불확실한 이벤트를 즐겨한다.
역시 답사가 습관화된 내 루틴은 훌륭하다.
사실, 손가락 답사를 더 잘했다면 이런 일이 없긴 할 텐데
꾀죄죄한 군인이 근사한 카페에 들어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매장 직원이 물어본다.
"어떤 것 이용하려고 오셨나요?"
카페에 커피 먹으러 왔지 와이파이 쓰러 오겠냐는 못된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며
"커피 먹으러 왔습니다."라고 답변을 했더니,
예상했다는 듯, "아 저희 매장은 음식을 시키셔야 되어서요~"
얼굴이 화끈거리고, 무안했다. 밥 먹으러 온 행색은 아니어 보였긴 하겠지만,
자신 있게 분위기 좋은 카페라고 지인을 데려왔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부끄러웠겠는가.
황급히 자리를 뜨면서 지도에 표시해 놓은 다른 카페를 검색했다.
결국 내가 가보고 싶었던 '갈 곳'이 '가본 곳'으로 신분 전환하는 감격적인
일이 생겨서 결론적으로는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다.
내 행색이 밥 먹으러 온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는 점이 아쉽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 정도는 감수하면서 살아야지.
[서울 속의 아마존]
나는 러닝이 취미다.
풍경이 좋은 장소에 가면 러닝 할 장소부터 찾는다.
서울에 가면 항상 한강에 들러서 러닝을 한다.
한강 다리를 내 다리로 걸어가 본 적이 없었다.
6개월간 살았음에도, 한강 다리를 걸어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러닝이 완전히 취미로 정착한 지금은
'오늘은 또 어떤 다리를 건널까'
간식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어린아이마냥 신이 난다.
지금은 몇몇 다리의 경우 실루엣만 봐도 어떤 다리인지
분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뭐.. 한강 다리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이번 나들이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
원래 계획했던 러닝코스는 아래와 같다.
[잠수교남단 -> 이촌한강공원 -> 원효대교 -> 흑석동 -> 잠수교남단]
총 2회 다리를 건너고 잠수교에서 시작하는 나지막한 오르막과 내리막은
몸을 풀기에 좋고, 용산을 지나가며 쭉 이어지는 평지는 몸을 데우기가 좋다.
마지막 흑석동을 지나가면서 경사가 꽤 높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다가
반포에 도착하면 다시 평지가 나타나기 때문에 재미있는 코스이다.
시간이 별로 없다면 한강대교에서 넘어오고,
시간이 더 여유롭다면 마포를 거쳐서 하프코스로 변형도 가능하다.
이날은 시간이 애매해서, 14km를 목표로 삼고 위의 경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절반에 해당하는 원효대교 남단에 도착했을 때 발생했다.
원효대교 남단에서 잠수교까지는 대략 7km 정도,
마지막 언덕이 남아있기에 체력적으로는 아껴가면서 살살 뛰어야 하는 구간이다.
사실 한강 러닝의 매력 중 하나는 길을 잃을 염려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익숙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지역별 랜드마크 정도는 눈에 익었기 때문에
한강과 건물들의 위치를 파악하면서 러닝을 하면 지도를 보지 않고 달리기가 가능하다.
한강을 한쪽에 끼고, 건물을 반대방향에 끼면서 달리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며 열심히 달리기에만 집중했다.
다만, 주의해야 하는 포인트가 하나 있다.
여의도에서 동작 쪽으로 빠져나올 때는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리고 있는 길에서 빠져나와 올림픽대로를 따라서 만들어진 길로 빠져나와야 한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분명히 흑석동의 언덕이 나를 반겨주어야 하는데,
국회의사당이 내 앞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중에 해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던,
여의도 고구마런(half)을 실수로 해버리고 말았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나중에 돌아오고 나서
지도를 보며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세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1. 생각하지 않고 길을 따라 달림
63 빌딩이 보이는 순간부터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냥 무지성으로 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직선이라고 생각했던 길이
알고 보니 곡선이어서 방향이 바뀌고 있는지도 몰랐다.
2. 샛강과 한강을 착각했다.
여의도에서 반포 방향으로 러닝을 할 때는 동쪽으로 달리는 내 기준에서
왼쪽이 한강이고, 오른쪽에 건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터널과 숲을 지나면서 달리다 보니
숲 너머로 보이는 물이 샛강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한강이라고 착각을 해버렸고,
더욱이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들이 동작구의 건물이라고 오해를 한 것이다.
그래서 국회의사당까지 달리는 동안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3. 여의도 밀림의 존재를 몰랐다.
여의도한강공원에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정도로 외진 오솔길 코스가 있다.
숲처럼 보이는 길이 있길래
재미있어서 들어갔다가
온갖 벌레와 사투를 벌이며 헤매다가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내 왼쪽 방향에 보이는 샛강을 보고 한강이라고 착각을 해버렸다.
원효대교남단에서 도착지점인 반포까지는 약 7km
원효대교남단에서 국회의사당까지는 약 3.5km 정도 된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63 빌딩까지 돌아오니 원래 뛰어야 했던 14km는 다 달린 상태였다.
너무 지치고 목이 마른 상태였고,
도저히 반포까지 뛰어갈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술 더 떠 휴대폰 배터리까지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결국 택시를 타고 반포로 복귀했지.
꾀죄죄한 행색의 나를 보고 기사님은 갸우뚱하셨고,
그 행색의 사람이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반포한강공원으로 가달라고 하니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셨을 것 같다.
뭐긴요.
서울에서 러닝 하다 길 잃어버린 사람이죠.
[추가 : 끝내주는 피크닉 장소 발견]
이촌한강공원에서 원효대교북단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보통은 강변북로 바로 옆에 있는 큰길로 달리는 게 보통인데,
왜인지 좁은 길로 달리고 싶어서, (무릎 또 해 먹으려고 트레일러닝 시도하는 나)
RM숲 남측에 있는 좁은 길로 달렸다.
달리다가 보니 외진 숲 속 길 한가운데에
끝내주는 풍광이 보이는 위치에
돌로 된 평상 같은 넓은 자리가 보이는 것이다.
넋을 놓고 왜 여기에 이런 게 있지 고민하다가
위치만 표시해 놓고 다시 달렸다.
벌레가 날리지 않는 날에
피크닉을 하기 딱 좋은 위치라 기억해 두고자
위치를 첨부한다.
나중에 여기서 피크닉 하고 후기를 꼭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