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는 여기에 도착하겠지
삶에는 언제나 목표가 있다. 하지만, 그 목표라는 것은 달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언제건 사라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이후에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새로운 목표를 찾는다.
그렇게 매일매일 주어지는 과제들을 해결하며, 중 단기 목표를 새우고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성장을 느끼고, 살아 숨 쉬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더 이상 목표가 생기지 않는 삶에 도달하면 어쩌지?
지금이야 새로운 것에 도전할 만한 시간도, 열정도 그리고 체력도 있으니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항상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있기에. 목표를 설정한 다음 도달하기 위한 타임라인을 구성하고 단기적 실천방안과 중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달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시간이라는 자원이 충분하기에.
목표를 잃어버려 방황했던 시기는 언제나 있었다.
청소년기에는 대학 가면 인생이 끝나는지 알았고,
대학생 시절에는 취업을 하면 인생이 끝나는지 알았고,
지금은 또 새로운 목표가 있다만, 시간만 들이면 되는 것이라 걱정은 없는데,
그 이후에는 어쩌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질문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돈다.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끔찍하리만큼 싫어하는 나에게, 저런 무료한 삶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의 굴레 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이상한 망상은 아닐 테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인생을 지루하게 보내면서도, 그 지루함의 반복이 헛되지 않게 살아내기 위한 묘안을 찾는 중이다.
목표라는 것이 꼭 그리 거창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아래의 리스트는 난이도의 여부와 무관하게 내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다.
1. 카페인 역치를 유지하기 위한, 휴지기 보내기
2. 꾸준하게 독서하기, 내 생각을 담은 글 쓰기
3.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새로운 경험 하기
4. 일주일에 최소 세 번 이상은 고강도 운동하기
5. 평소에 궁금했던 식당 방문하기
위에 명시한 목표들은 사실상 평생에 걸쳐서 해도 질리지가 않는 녀석들이다.
'임용시험 합격하기', '대학교 합격하기' 달성하고 나면 극도의 기쁨과 동시에 시간이 지날수록 특별했던 일상은 평범한 일상이 되어 결국에는 허무해질 수도 있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결국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평범한 사람이 최대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역치를 다루는 방법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주기성을 띄고 있는 사인함수의 그래프]
사인함수의 그래프를 먼저 보자. 사인함수는 주기성을 지니고 있다. x를 아무리 증가시킨다고 해도, y 값은 1과 -1 사이에서 진동을 한다. 갑자기 사인함수가 왜 나왔는지 의아할 수 있다. 일단 지켜보시라.
[ 가장 쉬운 형태로 표현한 엔트로피 ]
엔트로피는 물리학에서 시스템이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온도가 일정하다면, 에너지의 출입이 클수록 무질서한 정도는 증가한다.
이 말을 다르게 생각해 보자면, 온도가 커질수록 같은 열출입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질서한 정도는 작아진다.
설명을 해보자.
[설명 1]
이미 난장판인 방에 포카칩 한 봉지를 까서 흩뿌려놓는다(에너지의 출입)고 해도, 방의 무질서한 상태는 증가하겠지만, 크게 유의미하지 않다.(엔트로피의 증가량이 작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에 포카칩 한 봉지를 까서 흩뿌려놓게 되면, 기존 상태에 추가적인 어지러운 상태가 더해졌지만 상대적으로 혼란한 정도는 더 커진다.
[설명 2]
낮은 온도의 물에 열원을 t초간 가까이하는 경우와, 높은 온도의 물에 열원을 t초간 가까이하는 경우를 비교해 보자. (두 열원의 온도는 일정하게 유지되며, 각각의 물은 동일한 용기에 담겨있어 총 전달받은 열량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동한 열량은 동일하지만, 온도가 다르므로 단위시간당 변화하는 엔트로피(무질서한 정도)는 낮은 온도의 물이 더 크게 증가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어떤 시스템의 상태에 '추가적인 자극'이 들어왔을 때의 반응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미 기존에 받고 있는 자극이 크다면, 추가적인 자극이 들어온다고 해도 반응이 적을 것이고,
기존에 받고 있는 자극이 낮다면, 추가적인 자극이 작다고 해도 반응이 크게 돌아올 것이다.
그럼 우리가 느끼는 행복의 총량을 최대한 증가시키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불쾌의 소거나 쾌의 추구 등에 대한 행복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은 넘어가고,
오직 외부 자극에 의한 내 반응만이 존재하는 심플한 시스템을 생각해 보자.
직장인 A와 B는 연봉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도 비슷하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바라며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있다.
다만 둘의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누리는 쾌락의 정도를 어떻게 운영하는지의 방식에 있다.
한 가지 전제를 놓고 시작하겠다.
쾌란 현 상황이 만족스러운 정도를 말하고, 불쾌가 작용하면 쾌가 감소할 수 있다.
쾌락의 증감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불쾌와 불행은 생각하지 말자.
쾌락이 증가하면 행복도는 증가하고, 쾌락이 감소하면 행복도는 감소한다.
쾌락은 자본을 투입하거나 충분한 휴식이 주어졌을 때 증가하며,
일정한 정도의 쾌락이 유지되면, 쾌의 기준이 점점 상승하기에 실질적인 행복도는 감소할 수 있다.
결국 자본을 투입해서 쾌라는 값을 증감시킬 수 있고,
쾌가 증가하면 행복도는 상승한다는 시스템을 구상해 놓은 것이다.
직장인 A는 일주일 식비 14만 원을 고루 분배해서 하루에 2만 원씩 사용한다.
직장인 B는 일주일 식비 14만 원을 차등적으로 분배해서 사용한다.
가령, 평일에는 하루 1만 원씩 주말 이틀 동안에는 9만 원을 사용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누가 더 행복할까?
직장인 B는 평일에 쪼들려가며 살다가 주말에 시원하게 돈을 사용하고,
직장인 A는 매일 동일하게 돈을 소비한다.
아까 가정한 바에 따르면, 쾌라는 것은 역치를 올리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결국 높아진 기준에 적응하고,
더 쾌적하고 윤택한 삶을 바라게 된다.
"아, 치킨 한 조각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과연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이 사람에게 새로운 소원이 생기지 않을까?
다이어트를 끝내고 먹는 치킨 한 마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을 주지만,
매일 치킨을 먹는 사람에게는 치킨이 불러다 주는 행복은 점점 감소하게 된다.
마치 경제학에서 다루는 한계효용의 법칙처럼 말이다.
치킨을 계속 먹다 보면, 결국 한계효용이 0을 넘어서 음의 값을 가지는 경우도 생긴다.
"아 치킨 진짜 물려서 못 먹겠네."
대학생 시절 달콤한 방학 기간이 생각나는가?
학기 중에는 방학과 주말을 너무나도 목 빠지게 기다린다.
주말은 너무 짧고, 학기는 너무 길다.
학기가 마무리되고, 방학이 시작되자 긴긴 휴식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행복하다. 학교에 가지 않고 푹 쉴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하지만, 결국 방학이 끝나갈 때쯤에는 학교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방학은 처음에는 너무나도 행복하지만, 그 휴식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체감하는 효용은 감소하여
이내 음의 값에 이르게 된다. 그 순간이 바로
"아, 쉬는 것도 지루해 차라리 빨리 학교에 가고 싶어"
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결국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면, 우리는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자원을 무한히 투입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쾌가 무한하다면,
일차함수 형태의 쾌락선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쾌락이 점점 증가하기에, 쾌락에 익숙해짐에 따른 역치의 상승이
상쇄되고, 계속 비슷한 수치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이다.
아쉽게도, 인간에게는 무한한 쾌락이란 없으며
그나마 유사한 것이라고 하면 한번 손을 대면 끝이라는 마약이 있겠다.
마약이 인간에게 미치는 해악을 글로 쓰자면 끝도 없겠다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느껴버렸으니 인생이 얼마나 불행하고,
답답하겠는가.
직선 형태의 쾌락은 자본이 무한하다고 해도 누릴 수 없는 허구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직장인 B의 주기성 있는 삶을 노려봐야 한다.
직장인 B는 사인함수와 같은 주기성 있는 삶을 산다.
평일에는 식비를 아끼며(겸사겸사 식단) 살아간다. 평일에는 맛없는 닭가슴살만 씹으며
건강식을 먹는다.(물론 건강식이 돈이 더 들지만 예를 그렇게 들자는 것이다.)
주말에는 고기도 먹고, 치킨도 먹고 친구랑 맥주도 한잔 한다.
평일에 닭가슴살만 씹을 때는 쾌락이 낮은 상태였으니 어느 정도 불행했지만,
그 식단의 결과는 건강한 삶의 영위라는 가치에 반영이 되었으니 상쇄된다.
그리고 주말에 쾌의 상승으로 높은 행복감을 누린다.
사인함수의 개형과 비슷한 삶이다.
우리의 삶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마땅히 위와 같은 자원 분배 전략을 세워
행복의 지속적인 추구를 노려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래서 지속적으로 나에게 쾌가 감소하는 상황을 제공한다.
운동을 한다던가. 카페인을 일시적으로 끊는다거나, 식단을 하는 방식 등을 통해서 말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당면했을 때는 힘들고 괴롭지만, 행복한 삶의 지속적 영위라는 가시적인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기에 충분히 감내할만하다. 내가 선택한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참고 참다가 맛보는 인내의 열매는 사무치게 달다.
그래서 나는 가장 맛있는 음식을 나중에 먹는 편이다.
먼저 먹어버리면, 나머지가 맛이 없어버리니까. (초밥을 먹으면 기름진 오토로는 나중에 먹는다.)
음식 한 입에 배가 부르지는 않으니까요.
아닌데, 나는 매일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삶에서 오는 편안함이 곧 행복인데?
당신 말이 옳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나와 뇌 구조 자체가 달라서 그런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런 성향은 축복받은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
물론 평범하게 지속되는 삶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만,
쾌의 추구보다는, 불쾌의 회피가 대개의 경우 더 쉬운 법이다.
쾌는 무엇인가가 더해져야 생기는 것이라면
불쾌는 무엇인가가 사라져야 생기는 것이니까.
안온한 삶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
어쩌면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은 나에게 지루한 삶의 안내자가,
나는 그 사람에게 불쾌를 피하면서도, 자극적인 삶의 안내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일상은 평평하게, 일탈은 뾰족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