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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소외된 사람들

by 박승연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작성되었으며,

페이지가 표시된 '인용'은 책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옮겼음을 밝힙니다.

인용이 되지 않은 모든 문장은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우리는 소유양식으로 기억할 수도, 존재양식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
- p. 54 -


예컨대, 일상으로부터의 환기를 위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상황을 가정해 보자. 여행자 A는 여행에서 경험하는 모든 상황을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긴다. 때로는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사물이나 풍경을 눈으로 담는 과정에 소홀한 경우도 있다. 피사체를 보이는 그대로 완벽히 남기기 위해 눈을 대상에 두는 것이 아니라 뷰파인더를 거친 사물만을 바라본다.


공연장에서 공연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높게 뻗어 공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과정에서 가려짐이 없이 잘 담기고 있는지 화면을 흘긋거리느라 정작 주요한 장면을 놓쳐버리는 관람객의 모습과 닮아있다.


여행자 B는 여행에서 경험하는 모든 상황과 경험의 느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사진을 찍거나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의 배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고 싶은 정보나 상황에 대해서 기억의 휘발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뿐이다. 풍경을 눈으로 보고, 영감을 얻는다.



음식을 먹고 식쟤료의 조합이나 향신료를 음미한다. 기존에 먹었던 음식과의 닮은 점이 있는지, 쟤료를 어떤 식으로 조리해서 이런 식감을 느낄 수 있는지 생각하고 비교해 본다. 이 두 여행자는 같은 여행지에서 동일한 경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여행의 결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A는 여행의 기억을 소유양식, B는 존재양식으로 다루고 있다. A는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을 자신의 존재와 결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기록과 사진으로 남겨 온전한 형태로 '소유'하고자 한다. 반면 B는 단지 기록과 사진은 여행에서의 경험이 자신의 존재와 연결되는 과정에서 소실될 염려가 있는 부분에 한정된 보조적인 수단일 뿐 자신의 경험 자체를 자아와 연결시켜 느낌으로 남긴다.



존재적 실존양식에서의 기억행위는 일찍이 보았거나 들었던 것을 소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p. 55 -

B는 여행에서의 경험과 상황을 관련 있지 않은 상황에서 떠올리지는 못할지언정, 분명히 그의 내부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유사한 상황을 경험하거나 단서가 되는 대화에서 자신이 경험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할 것이다.


"아 이거 내가 예전에 여행지에서 봤던 구름의 모양과 비슷하네? 기후랑 관련이 있는 것인가.."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에서의 기억행위는 구름을 보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외부의 물건인 휴대폰이나 사진첩에서 여행지에서 촬영했던 구름의 사진을 찾아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이다. 기억이 자신의 존재와 결합되어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사진첩'이라는 소유물에 기억을 위탁한 '사진'이라고 하는 소유물을 꺼내어 기억을 되살린다.



둘은 모두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기억'하는 행위이지만 기억에 대해서 소유양식이냐 존재양식이냐에 따라 근본적인 행위의 차이가 있음이 드러난다. 과연 두 가지의 상황 속에서 어떤 기억이 소외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풍경을 뷰파인더로 보는 사람과, 풍경을 두 눈으로 담으려고 하는 사람 중에서 말이다. 사진으로 남기는 행위는 되살린 기억이 더 정확할지언정 기록의 행위 주체가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사물로부터의 위탁에 기반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스스로가 느끼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설령, 두 눈으로 담은 풍경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풍경을 보고 새로이 불러낸 이미지와 감상에 오류가 있어 과거의 기억 속의 풍경과 지금 실제로 보고 있는 풍경의 유사도가 떨어진다고 해도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순간에 내가 연상하는 기억과 눈으로 보고 있는 현상이 연결되는 그 순간의 떠올림은 부정확할지언정 분명히 내 안에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소유하고 있는 사물로부터의 위탁 없이 내면에서 새로이 생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여행자는 여행을 함께 떠난 사람들을 살펴보다 보면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필자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카메라에 풍경을 담느라 정작 그 순간의 모습에 소홀했던 상황이 여럿 떠오른다.



피사체를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 미덕인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의 회화와 대상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이 주된 토픽이 되는 그 이후의 회화를 한번 생각해 보자. 누가 더 바람직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여행에 대한 방식은 그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할 것이니까. 다만, 본서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아래와 같을 것이다.


소유물로부터 위탁되어 존재하는 정확한 기억과, 내면으로부터 새로이 생성되어 변형을 거쳐 소생된 기억 중 당신은 어떤 것을 택하고 싶습니까?


사람에게 경례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장에 경례하는 것이다.
- 인터넷 -

계급사회에서는 '권위'가 사람에게서 베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계급이나 지위에 소유되고 있음이 위 문장에서 드러난다. 위 말에서 지칭하는 '소유하고 있는 권위'는 권위의 소유자가 권위를 행사할 경우에 권위가 제 기능을 발휘한다. 반면, '존재하고 있는 권위'는 행사할 필요가 없다. 타인에게 지시나 명령을 하지 않더라도, 해당 개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권위는 주변을 감회시켜 시키지 않더라도 따르고 싶게끔 사람을 이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의 존재로 인간의 가능성을 실존해 보인다.
- p. 63 -

교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전통적으로 취급되는 교권이라 함은 '교사의 권위'를 말한다. 지금에서야 교권의 재해석으로 '교육할 수 있는 권위'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지만, 여기에서는 전통적으로 취급되는 해석을 다루겠다.



교사의 권위는 스스로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내가 교사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교사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하는 말이 충분히 그럴듯하고, 따름에 있어서 스스로의 행위가 본보기를 보이기 때문에 따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교칙이니 학칙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다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에게는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고, 사회적으로도 그러한 인식이 분명히 존재한다. 입바른 소리를 하더라도,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권위가 배어 나오지 않는다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분명히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지나 잘하지.


규칙이기 때문에,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따라야 해. 보다는,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문제점들과, 서로의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고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을 대화와 사례로 스스로 깨닫게끔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어려운 이유는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필요를 깨닫게끔 내면을 건드리는 작업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세밀한 조정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은 지식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필요한 각종 역량과, 타인과 협력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배운다. 스타강사의 강의를 그대로 베껴내어 칠판에 옮기는 역량이 필요 없다기보다는, 학교라는 공간의 특성에 맞는 본질이 흐려지지 않는 선에서의 적절한 중심을 잡기 위한 노력이 더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소 잡는 칼을 아무리 예리하게 벼려낸다고 해도, 대충 벼려낸 일식도의 그것과는 비할 바가 안 된다. 학교는 학원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학교 본연의 가치를 지켜내고, 사회에 진입하는 일반 국민들의 하방을 지키는 보루가 되어야 한다.




사랑의 행위 역시 소유양식으로 말해지는가 존재양식으로 말해지는가에 따라서 두 가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소유양식의 사랑은 물질화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불분명한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상대의 실체화된 행동에 대한 통제로서 소유하고자 한다.



예컨대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제한이나, 상대의 감정을 조절하려는 시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상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소유양식의 사랑은 결국 상대의 본질적 상태를 파괴하는 행위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내 마음대로 행위해야 사랑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봐야 한다. 조건이 충족되어야 사랑이 가능하다면,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바꾸려 한다는 말과 모순되어 이치에 맞지 않다. 애초에 사랑에 빠지지 않은 상태에서, 너를 사랑하기 위해 변화시키려 하는 것이다.라는 태도는 비록 파괴적 행위일지언정 소유양식의 사랑이라고는 칭할 수 있겠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추상적 개념인 사랑이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통제라는 실체적 행위력에 대한 소유물로 격하되었으므로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에 익숙해진 인간의 특질이 발현되어 사랑 또한 유사항 형태로 사용되는 것이다.



반면, 존재양식의 사랑은 추상적 개념인 사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와 나의 감정적, 행동적 교류에 있어서 동등한 입장을 취한다. 누군가를 배려하고,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모습조차 상대의 모습이기에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성장과 즐거움을 경험한다. 상대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고민해 보고, 스스로 느껴 변화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랑이라고 할 법하다. 그렇다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고 주장하며 자유로운 다자관계를 표방하는 폴리아모리즘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고 취급할 것이 아니라.



파트너의 숫자를 늘려서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으로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권태를 물리침으로써 사랑의 난점을 기피하려는 사람들이다.
- p. 73 -



사랑이라 함은 결국 공동생활의 집단적 기초가 되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 결혼을 하게 되어 두 남녀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경제적 활동과 서로에 대한 제한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서로를 소유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릇된 기대감이 결국 사랑을 정지시킨다.
- p. 73 -

사랑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며 특별한 교류를 지속적으로 영위하는 두 남녀의 행위의 통칭이다. 연애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불가능하지만, 사랑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지속할 수 있다.



존재양식으로서의 사랑을 시작한 두 남녀가 제도적 결합인 결혼을 통해서 서로를 직 간접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구조에서 원래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항상 경계하고, 상대와의 결합이 실제 행동에서 한정지 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교류와 서로가 독립된 개체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기를 노력해야만이 존재에서 소유로의 변질을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될 것이다.



상대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내 감정이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적이 있다. 사랑이 아니라기엔, 노력이 가상했다. '소유적 양식에서의 사랑'이라고 해보자.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나는 영적인 존재도 아니고 분명히 현실을 살아가기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제약이 아주 많다.


발견

나 홀로
숲 속을 거닐었지.

아무것도
찾을 뜻은 없었네.

그런데 그늘 속에 피어 있는
작은 꽃 한 송이 보았지.

별처럼 반짝이고
눈망울처럼 예쁜 꽃을.

그 꽃을 꺾고 싶었는데,
꽃이 애처롭게 말했네.
내가 꺾여서
시들어버려야 되겠어요?

하여, 꽃을 고스란히
뿌리채로 캐어,
예쁜 집 뜨락으로
옮겨왔지.

조용한 자리에
다시 심어놓으니,
이제 늘 가지치고
꽃 피어 시들 줄 모르네

-괴테- 본문 p. 37


이 시에서 드러나는 태도가 중간 즈음의 타협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대를 등 떠밀어 바뀌게 하려는 방식의 '소유적 실존양식의 사랑'보다는 다양한 상황과 방법을 간접적으로 체험시켜 스스로의 상황에 대한 제약을 깨닫고, 본인의 내면으로부터의 의지에 기반한 변화를 바라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가를.



안식일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이 제도의 핵심까지 파고들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노고를 일체 던다는 의미에서 휴식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재수립한다는 의미에서의 평온함을 뜻한다. 그 어떤 것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새롭게 짓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평온함 말이다. 안식일에만은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존재하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 듯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 p. 63 -


인간은 필연적으로 집단생활이 강제된다. 그렇지 않다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 물 보듯 뻔하다. 인간은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비해서 형편없는 신체 기능을 가지고 있다. 새처럼 날지 못하며, 돌고래처럼 헤엄을 칠 수도 없다.



다만, 그 높은 지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섬세한 손의 기능과 더불어 언어의 발달로 타인과 의사소통하며 사진의 경험과 지식을 후대에 전달하는 강력한 시대를 초월하는 연결성을 지니고 있다. 뉴턴이 말했듯이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단순 합으로 더한 것보다 개개인이 협력한 역량이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에게 소유가 강제되는지도 모른다. 당장 내일이 어찌 될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늘 필요한 물건만을 존재를 위한 도구로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 농산물을 만들고 저장하는 '소유'행위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는 앞날의 대비를 위한 수단적 행위를 넘어서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목표이자 개인이 내세울 수 있는 권위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서 안식일이 가지는 의미를 조명해봐야 한다. 결국 집단 속의 인간은 일정 부분 이상 소유를 하지만, 그 소유의 행위 자체가 결국 존재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므로 안식일의 의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되새겨보는 정화의 기간이자, 흐려지는 본질을 붙잡아두기 위한 행위이다.



오로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닌 외부의 것들을 탐하거나 변형시키거나 옮기지 않으려고 하는 소유에서 본질인 존재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이 안식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가 흐려지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단순히 일과 삶으로부터의 휴식이나 음식을 끊어내는 수양의 개념과는 구별 지어야 할 것이다.



음식을 소비하는 것조차 외부 세계의 것을 내 안으로 들여 소유하고자 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이처럼 안식일을 보내며 소유와 관련된 일체의 것들을 끊어내는 과정을 통해 소유로 점철된 인간의 생은 다시 존재로 되돌아간다. 나는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가?



소유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한 사회에서는 소유를 위한 행동이 당연시되기 때문에,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외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배금주의적 태도가 진리이고, 돈은 만물의 가치를 환산해 내는 신과 같은 존재로 격상되어 취급된다. 적어도, 우리는 이들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달리고 있는 길이 확연히 주를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닦여있지 않은 길을 달리는 이들을 응원하지는 못 할지언정 조롱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고행길을 걷는 이들을 존경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필자는 중간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정도 소유해야 존재를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우리 모두는 안빈낙도가 가능한 안회와 같은 사람이 아니기에, 이 정도의 타협이 양보할 수 있는 선인 듯하다.




현세를 살아가는 개인인 나는 영적인 존재가 아니기에 완전한 존재양식을 추구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결국 상호작용하는 주변의 모든 대상과 경험이 소유를 종용하는, 소유를 하게끔 강제하도록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변명이라고 하면 맞다. 다만, 본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나에게 생긴 균열은 분명하다. 내 삶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수많은 것들이 나를 존재하기 위해서 소유하는 것인지, 소유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지 고려하게 만든다.



두 개념 중에서 어떤 것이 선행하느냐에 따라 삶에 대한 태도는 확연히 달라진다.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말이다.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고자 하는 이 순간에도 지금의 생각이 휘발될까 두려워 쉼 없이 펜을 움직이고 있다.



다만, 이제 이것은 분명하다. 이 순간의 기록은 소유를 위한 행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존재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소유행위이다. 소유를 삶 속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소유의 행위가 존재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소유의 삶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도록 늘 경계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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