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체로 읽는 밀의 역사
나는 실제로 애기장대를 다뤄본 적은 없지만, 논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식물은 언제나 애기장대다.
염색체가 적고 구조가 단순해 파악하기 쉬운 식물.
이미 누군가 모든 것을 잘 정리해 설명서를 펼쳐 둔 듯한 식물이 바로 애기장대다.
하지만 염색체 실험을 실제로 해보면, 식물이라는 대상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미경 아래에서 기대했던 만큼의 염색체가 보이지 않기도 하고,
반대로 예상보다 더 많이 관찰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던 배수체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하나의 식물체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기보다는,
같은 종 안에서도 서로 다른 유전적 배경이나 계통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실험은 그 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에 가깝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간다.
실험실에서 만나는 식물조차 단순하지 않다면, 우리가 실제로 먹고 재배해 온 식물들은 어떨까.
밀은 하나의 식물처럼 불린다.
하지만 염색체의 세계에서 밀은 하나가 아니다.
같은 이름 아래 전혀 다른 내부를 가진 존재들이 겹쳐 있다.
밀은 용도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예를 들어 파스타를 만드는 밀과,
빵을 만드는 밀이 있다.
파스타에 쓰이는 밀은 보통 듀럼밀이라 불린다(Triticum turgidum ssp. durum). 알갱이가 단단하고, 반죽해도 쉽게 퍼지지 않는다.
그래서 면을 뽑아도 형태가 잘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우리가 흔히 먹는 빵을 만드는 밀은 빵밀이다(Triticum aestivum).
반죽 속에서 잘 늘어나고, 공기를 머금을 수 있다. 굽는 동안 부풀어 오를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
겉보기에는 모두 비슷한 곡식이지만, 이 둘은 같은 밀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다.
겉모습은 비슷하다. 밭에서 자라는 모습만 보면 이 둘을 다른 밀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 차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듀럼밀과 빵밀의 차이는 각각이 가지고 있는 염색체의 개수에서 비롯된다.
이 차이는 시간이 지나며, 그리고 사람이 개입하는 순간부터 더욱 또렷해진다.
재배의 현장은 이러한 차이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소다.
실험실에서 염색체를 바라볼 때도 비슷한 감각을 느낀다.
현미경 아래에서는 숫자와 배열로만 보이던 차이가, 맥락을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성질로 이어진다.
같은 식물이라는 이름 아래 놓여 있어도, 그 내부의 조합은 전혀 다른 반응을 만들어낸다.
어떤 밀은 빻고 반죽하는 과정에서도 형태를 유지했고, 어떤 밀은 공기를 머금으며 부풀어 올랐다.
사람들은 이런 차이를 반복해서 경험했고, 밀은 점차 서로 다른 쓰임을 가진 곡식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이 차이는 자연스럽게 생겨난 결과라기보다, 사람의 개입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서로 다른 밀이 의도적으로 교배되었고, 그 과정에서 염색체는 겹쳐진 채 남았다.
사람들은 그중에서 더 잘 가공되는 밀을 골랐고, 원하는 성질을 가진 밀을 다시 심었다.
염색체의 차이는 그렇게 유지되었고, 반복되며 하나의 밀로 굳어졌다.
염색체는 식물이 겪어온 개입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성공과 실패를 가리지 않는다.
다만 어떤 식물이 인간의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왔는지,
어떤 식물은 야생에 남았는지를 그저 구분해 둘 뿐이다.
밀은 그 기록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다.
밀의 현재는 인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졌지만, 그것이 곧 식물의 의지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밀은 인간의 손을 빌려 자신이 더 넓게 번성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한 식물에 가깝다.
인위적인 교배와 재배를 거치며 밀은 야생의 친족들보다 훨씬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자연 상태에서는 만나기 어려웠을 염색체 조합은 인간의 밭에서 반복되었고,
그 결과 밀은 지구 곳곳에서 가장 성공한 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생각은 실험 결과를 정리할 때마다 다시 떠오른다.
숫자와 표로 정리된 염색체 정보는 언제나 담담하지만, 그 뒤에는 분명한 선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밀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염색체 안에 어떤 길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를 남겨둘 뿐이다.
우리는 그 기록 위에서 이름을 붙이고, 구분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식물의 어떤 기록 위에 서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