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네, 그리고 살아 있는 분류학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린네의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명법의 창시자이자, 오늘날 식물을 분류하는 체계의 출발점에 서 있는 인물.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의 명명법과 분류 체계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사람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해왔다.
질서를 만들었고, 이름을 붙였으며, 자연을 정리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믿었다.
과학을 공부하며 접해온 많은 교과서와 개론서에서 린네는 언제나 '정답을 제시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자연을 두 개의 이름으로 정리해냈고,
그 체계는 지금까지도 거의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 서술은 나로 하여금 분류학이 이미 완성된 틀 위에서 작동하는 학문이라는 인상을 주었고,
그 틀을 만든 린네 역시 단호하고 흔들림 없는 과학자였을 것이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 린네라는 인물을 조금씩 들여다볼수록,
내가 떠올렸던 그 단정한 얼굴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분류를 기록한 책에서는 단정 대신 물음표와 의문이 반복해서 등장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분류에 확신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오히려 이름을 붙이면서도 동시에 그 이름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물음표는 망설임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남겨진 기록이었다.
종명 옆에 조용히 붙어 있는 물음표 하나는,
얼핏 보면 사소한 기호처럼 보이지만 그 자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확정된 이름 옆에 남겨진 질문은, 분류가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표시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지금은 이렇게 부르지만, 이 이름이 최종일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에 가까웠다.
var., aff.와 같은 약어들 — 변종이나 유사종을 가리키는 — 은 그가 이 식물을 지금 당장 구분짓기보다는,
후대의 판단을 위해 남겨두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기록들은 그가 분류를 멈춘 것이 아니라, 판단을 유보했을 뿐임을 보여준다.
그는 누구보다 과학자다웠고,
자신의 분류마저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증했던 태도를 기록으로 남긴 사람에 가까웠다.
이 태도는 지금의 분류학에서도 다르지 않다.
분류학자들은 이미 완벽하게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종들조차 끊임없이 의심하고, 검토를 반복한다.
표본관에서 일하던 시절, 같은 종명으로 묶여 있던 표본들이 다시 나뉘고,
기존의 라벨 위에 새로운 이름이 덧붙여지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았다.
분류가 한 번의 결정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 경험은 종이라는 개념이 하나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유동적이며 언제든 다시 질문될 수 있는 것임을 나에게 처음으로 알려준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동정이라는 상태를 실패가 아닌, 잠재된 가능성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보고서나 논문에서 '미동정'이라는 말은 종종 불완전함이나 부족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쓰이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그 상태는 오히려 질문이 열려 있다는 증거에 가까웠다.
아직 이름이 붙지 않았다는 사실은, 판단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더 많은 관찰과 논의를 기다리는 책임 있는 유보처럼 느껴졌다.
린네의 물음표는 불확실함에서 비롯된 의문이 아니라,
언젠가 미래의 누군가가 이 종의 가치를 다시 발견할 것임을 조용히 내포한 기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유동성은 분류학이 멈추어 고여 있는 학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살아 있는 학문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분류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분류는 사물을 단정하기 위한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언제든 다시 질문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는 일에 가깝다.
이름을 붙이면서도 그것이 최종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
판단을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열어두는 방식.
린네의 물음표와 표본관의 미동정 표본들은,
분류학이 확신의 학문이 아니라 책임 있는 망설임의 학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