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은 언제부터 본질이 되었을까

엽록소와 보라색 지구 가설

by 루인

글감을 찾다가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발견했다. ‘보라색 지구’라는 가설이었다.

우리가 초록색으로 기억하는 이 행성이, 한때는 보라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내 글을 계속 읽어온 분들이라면 조금 의아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식물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구의 색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식물에서 조금 벗어난 주제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가설을 읽으며 떠올린 것은 결국 식물이었다.
우리가 식물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색, 바로 초록이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항상 지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번지는 색은 초록이기 때문이다.

숲과 들판, 새싹과 잎맥, 우리는 오래전부터 초록을 생명의 색으로 배워왔다.


환경을 상징하는 표지도, 생태를 말할 때의 배경도 모두 초록이다.

초록은 너무 익숙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색처럼 느껴진다.


보라색 지구 가설(Purple Earth hypothesis) 개념도. AI(ChatGPT)를 이용해 생성.

물론 ‘보라색 지구’는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설이라는 사실이 질문의 힘까지 줄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상상은 내가 너무 쉽게 전제로 삼아온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엽록소를 분리해 본 적이 있다. 액체 크로마토그래피 실험이었는데,

초록색 잎을 곱게 갈아 용매에 풀고, 점을 찍어 종이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색을 관찰하는 실험이었다.

처음에는 하나의 짙은 초록이던 점은 시간이 지나자 여러 갈래의 띠로 나뉘어 퍼져갔다.

연한 노란빛, 푸른 기가 도는 초록, 조금 더 탁한 색이 층을 이루며 올라왔다.


그 장면은 분명 흥미로웠지만, 그때도 나는 초록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엽록소는 초록이고, 식물은 초록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험은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보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답을 확인하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 이미 초록을 전제로 두고 있었다.
색이 나뉘어도 그것은 모두 ‘초록의 일부’라고 여겼다.

왜 하필 초록인가를 묻기보다, 초록이라는 결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식물을 더 깊이 공부하게 된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엽록소는 태양빛 가운데 붉은빛과 푸른빛을 주로 흡수하고,

녹색 영역은 상대적으로 반사한다. 그래서 잎은 초록으로 보인다.


우리가 보는 초록은 식물이 사용한 빛이 아니라,

사용되지 않고 되돌아온 빛이라는 사실도 공부했었다.

그럼에도 초록은 여전히 본질처럼 느껴졌다.


보라색 지구 가설은 이 지점에서 생각을 흔든다.
오늘날 일부 고세균은 엽록소 대신 레티날이라는 색소를 사용해 빛을 이용한다.

이 색소는 녹색 빛을 흡수하고, 붉은빛과 푸른빛을 반사한다.

그 결과 이 생명체는 보라색에 가깝게 보인다.


만약 이런 방식의 광에너지 이용이 더 먼저 등장했다면,

초기 지구는 우리가 떠올리는 초록이 아니라 자줏빛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이 가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왜 우리는 초록을 처음부터 정해진 색처럼 믿어왔을까.


우리는 지금 눈앞에 가장 넓게 펼쳐진 색을 자연의 기본값처럼 받아들인다.

가장 흔한 것이 가장 근본적이라고, 오래 지속된 것이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금의 모습은 수많은 경쟁과 우연, 환경 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하나의 경로일 뿐이다.


초록은 시작이 아니라 결과일지도 모른다.
가장 강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에 남겨진 색일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실험실에서 종이 위로 퍼져가던 그 색들도 하나의 과정이었다.

나는 그 색을 분리하면서도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초록은 식물의 색이라는 믿음은 실험보다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시작을 상상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숲을 덮고 있는 초록을 보며, 그것이 처음부터 자연의 색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초록은 긴 시간 끝에 남겨진 자리일지도 모른다.


숲은 여전히 초록이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그 초록이 전처럼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 선택과 조정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쩌면 자연은 한 번도 스스로를 초록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기억해 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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