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최고의 빌런이 된 김 부장

by 청비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어떤 인물이나 지명과도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복도 끝에서 김 부장의 묵직한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일 없다는 저 표정 좀 봐. 뻔뻔하기도 하지."

"그러게 말이야. 양의 탈을 쓴 늑대가 따로 없다니까."

걸음소리가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이 솟구쳤다.

말끔한 인디고 블루톤의 슈트 차림과 무표정한 그의 모습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렇게 다 까발려진 상황에도 당당하다 그거야? 진짜 재수 없어!"

홍보팀 미스채가 그의 뒷모습에 대고 직구를 날렸다.

머지않아 김 부장은 회사로부터 내쳐질 운명이라고 생각한 미스채의 용기가 불러온 상황이었다.

늘 그랬듯이 김 부장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켜고 머그잔에 진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내렸다.


"똑 똑 똑"

회계팀 이 과장이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 과장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무슨 용무가 있나?"

김 부장이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물었다.

"지금은 이 과장이 아니라 후배로써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이 과장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래? 대충 예상은 되지만, 어쨌든 말해 봐."

김 부장은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선배님,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변명이든 거짓말이 든 간에.... 선배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에게 침묵은 너무 무책임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장의 목소리는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한 마리 길냥이처럼 흔들렸다.

"그럼 너도 이 상황의 피해자는 너라고 생각하겠지? 나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서 실망하고 좌절한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라고 그렇게?"

김 부장은 마른세수를 하며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피해자 그런 거 따위 운운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 인간에 대한 그동안의 동경, 존경 그런 것들이 산산이 부서졌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 과장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말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김 부장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김 부장은 입을 떼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이 과장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얼마 전까지 숲의 울창한 나무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구겨진 종이가 되었다면 제정신일 수 있을까? 이제 그렇게 구겨져서 버려지는 일만 남은 건가?"

"버려지면 결국 더 이상 나무도 종이도 아닌 쓰레기가 되겠지. 그래서 지금 생각 중이야. 구겨진 종이를 펴야 할지, 그냥 버려질지......"

흐릿한 안개 같은 말들이 자욱했다. 하지만, 이 과장은 지금 김 부장에게 얼마간의 말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 좋기로 소문난 김 부장이 하루아침에 최고의 빌런이 되었으니까.

장애를 가진 17세 소녀, 애 키우는 이혼녀, 미혼모......

그가 여러 여자들과 만난 정황들이 포착되고 드러났다. 하나같이 아픔이 있는 사회의 약자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더 구겨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