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기록

향수

by 외국인 노동자


나는 적응이 두렵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 모두가 하던 게임, 메이플스토리에서 오르비스에 가기 위해선 엘리니아에서 하늘을 나는 배를 타야 했다.


그 배를 탈 때마다 나는 항상 설렜다.


어떤 여행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몬스터들이 있을까. 어떤 마을이 펼쳐질까.

하지만 그 배를 여러 번 타다 보니, 설렘은 점점 줄어들었고, 마침내는 그 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건 어쩌면, 여행에 적응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적응이 두렵다.


적응이란, 즐거움을 지겨움으로, 설렘을 무감각으로 바꿔버리는 무시무시한 인간의 본성이다.


수능을 마치고 처음 떠난 해외여행에서, 나는 인천공항을 처음 경험했다.

그 순간, 마치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항구에 선 기분이었다. 낯설고 두근거리는 장소, 출발과 기대가 겹쳐 있는 공간.


전날 밤늦게까지 캐리어에 짐을 싸며 느꼈던 설렘은 공항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인천공항의 에스컬레이터만 타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헝가리에 오기 전까지 비행기를 타 본 건 딱 두 번 뿐이었다. 그래서 그 설렘이 오랫동안 유지됐던 것 같다.

헝가리에 도착한 후, 나는 종종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게 되었다.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여행은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었고, 점차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이동을 거친 어느 날,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기분은 좋았지만, 예전처럼 가슴이 뛰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헝가리로 돌아갈 때, 나는 깨달았다.


늘 두근거림을 안겨주던 인천공항이 더 이상 내 심장을 뛰게 하지 않는다는 걸.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에 익숙해진 나는, 이제 여행에서 설렘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헝가리에 도착하자, 모든 것이 ‘불안조차 없는 지루함’으로 바뀌었다.

표를 제대로 샀는지, 기차 시간은 맞는지, 버스를 잘 탔는지 같은 긴장감도 사라졌고, 일상은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나는 점점 자극적인 것들을 찾게 되었다.

스크롤링, 술, 자극적인 뉴스들이 내 하루를 채우기 시작했다.

뇌가 썩어 들어가는 듯한 인생 속에서, 문득 향수가 찾아온 것 같다.


향수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고향이 그리웠던 것 같다.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봤고, 그럴수록 고향이 그리워졌다.


자연스레 말수가 줄었고,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입을 닫게 되었다.

그런 침묵이 때때로 나를 보호해 주긴 했지만, 그것이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로.


자극적인 것들을 하나씩 줄이고, 새로운 일상을 개척해 보기로 했다.


영어 외의 언어를 배우고, 음식을 만들고,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하나씩 덜 어내며 나아가자, 향수로부터 조금씩 멀어질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엔 실패도 했고, 방법도 몰라 어려웠지만, 어느덧 나는 향수로부터 멀어졌다.


향수는, 타지에서의 익숙함이 설렘을 0으로 수렴시킬 때 찾아오는, 기분 나쁜 적응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나는 다시 설렘을 찾기 위해, 조심스럽게 일상을 바꿔나간다.


내일은 카페에 가야겠다.

혹시 모른 지. 그곳에서 다시 한번 두근거림을 찾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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