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의 변화
NK. 나는 그녀의 이름을 핸드폰에 저장했다. 그리고 멋쩍게 웃으며 가게를 나왔다.
"또 올게요."
"네, 또 오세요."
나가며 가게의 큰 창 너머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보고 있었고,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우린 서로를 보고 활짝 웃었다.
이틀 뒤, 나는 다시 그녀의 카페를 찾았다.
오전 10시 반쯤이었고, 출근시간도 점심시간도 아닌 탓에 그녀의 가게는 한산했다.
이틀 만의 방문이었지만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당연했다. 찾아오는 손님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그리고 나는 가방 안에서 텀블러를 꺼내 들어...야 하는데
텀블러가 없었다. 텀블러는 없고 쉐이크 통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게 중요하잖아.
난 스타벅스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프로틴이나 타 먹어야 할 것 같은 물통에 커피를 달라고 하고 싶진 않단 말이야.
하지만 이미 가방 밖으로 쉐이트 통을 꺼내 든 후였다.
"여기에 담아주세요." (억지미소)
"네."
시작부터 뭔가 망한 것 같았다.
곧 원두 가는 소리만 공허히 가게 안을 채우고 있는데...
"요 근처에서 일하시나 봐요?"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작은 동네 가게를 찾다 보면 종종 듣게 되는, 편안한 아이스 브레이킹 느낌이었다.
"네. 근처에 작업실이 있어서."
"작업실이요? 어떤?"
"글 써요. 지금은 웹툰 스토리 쓰고 있거든요."
갑자기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다래졌다.
"웹툰이요? 대박, 저 웹툰 완전 좋아하는데."
"정말요? 제 거 나오면 꼭 봐주세요."
"당연하죠. 어디서 보면 돼요?"
"아, 아직 안 나왔어요. 연재 준비중이에요."
알고 보니 그녀는 굉장한 웹툰 광으로, 카페 일을 하다가 시간이 빌 때마다 웹툰을 본다고 했다.
"원래 잘 안 봤는데, 카페 일하면서부터 보기 시작했어요."
"그러셨구나. 여기는 얼마나 하셨어요?"
"2년 째에요. 작년 2월에 시작했으니까, 1년 채우고 이제 2년차."
20년 2월이면 막 코로나가 터졌을 때였다.
"딱 코로나 시작할 때네요. 힘드셨겠다."
"그쵸. 하지만 이렇게 버티는 게 어디에요. 그때쯤 같이 시작한 가게들 중에 망한 데도 진짜 많아요."
아쉬운 대화를 딱 끊듯이, 그녀가 내게 아메리카노가 담긴 쉐이크 통을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또 오세요!"
우리 사이는 딱 여기까지라는 듯이 건네진 쉐이크 통.
나는 그 통을 받아들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안녕히 계세요."
뭔가 씁쓸했다. 아무리 초콜릿 맛이 나도 아메리카노는 아메리카노인 것처럼.
이대로는 평범한 손님들 중 하나가 되어, 매일 쉐이크 통만 주고 받는 관계로 우리 사이가 정립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럴 수는 없다.
오늘 그녀의 카페에 가며 다시 한 번 느꼈다.
2층의 창문을 마주하던 때 느꼈던 햇살, 햇살에 비쳐 별처럼 반짝이던 먼지, 정갈한 나무 테이블, '비행운'과 '안전가옥 엔솔로지' 등 그녀의 취향이 한껏 녹아 있는 듯한 책들, 테이블 보의 무늬와 벽지에 붙은 일러스트들, 그리고 그것을 꾸미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그녀라는 인간에게
내가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귀여우면서 기품이 있었다. 귀여움은 선천적인 것이고 기품은 후천적인 것이리라.
웹툰 이야기를 할 때 커지는 눈은 또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그날 작업실에서 인터넷에 그녀의 카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블로그 리뷰 글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 글을 통해 그녀가 중국 유학 경험이 있다는 것, 그녀의 카페 이름이 중국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이어 인스타에 그녀의 카페 이름을 검색했다.
카페에서 파는 베이커리, 음료 등의 사진들이 정사각형 타일 안에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상상하고 오해하기 시작했다.
노랫말 같은 중국어를 읊는 그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자기만의 취향으로 가득한 예쁜 카페를 차린 그녀,
빵을 굽고 음료를 만들고 사진을 찍는 그녀, 한가할 땐 2층 테이블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거나, 바에 기대어 웹툰을 보는 그녀를.
전부 부질 없는 상상이었다. 현실의 그녀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내가 사랑을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바로 다음 날, 집 근처 가게에 들러 마카롱을 한 박스 샀다.
예전에 카페 알바를 할 때, 여자 동료에게 자주 먹을 걸 사다주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참 꼴불견이다 생각했었는데...
딱 지금 내가 그 꼴이었다.
그때는 참 별로였던 그 남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을 표현하고는 싶은데, 그거 말고는 별 다른 방법이 없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 남자는 좀 구질구질했다. 여자 동료가 거절의 의사를 밝혔는데도 자주 찾아와서 억지로 선물을 맡기고 돌아가곤 했으니까.
그러진 말아야지. 딱 한 번만 물어보는 거야. 그리고 까이면 그냥 돌아서야지. 여자 혼자 장사하는데 이런 일이 있으면 얼마나 귀찮겠어.
마카롱을 들고 지하철을 타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긴장이 돼서 토할 것 같은 느낌.
갑자기 생각해보니까 카페 사장님한테 마카롱을 준다는 게 좀 우습게 느껴졌다.
쉐이크 통을 주면서 아메리카노를 담아달라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가게에 마카롱이 없기는 했지만...
아, 벌써 망한 것 같은데.
"안녕하세요."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켜 정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온 걸 안 줄 수도 없잖아. 쨍그랑-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녀에게 텀블러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텀블러였다.
"아, 오늘도 오셨네요."
오늘도 오셨다는 얘기는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왜 이렇게 자주 오냐는 건가? 하지만 웃는 얼굴로 볼 때 나쁜 뜻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드르륵- 또 원두 가는 소리만 울렸다. 마카롱은 언제 꺼내야 하지? 지금인가? 아니면 음료를 받고 꺼내는 게 낫나? 미쳤어, 겨우 세 번 왔는데 무슨 마카롱이야? 조용히 음료나 받아서 갈 것이지.
"여기 음료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저 선물 있는데."
"헉 뭔데요? 빨리 주세요."
그녀가 생글, 웃으며 나를 재촉했다. 전혀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이렇게 뭘 주는 손님들이... 많은가?
"마카롱이에요. 여기."
"우와, 저 오늘 마카롱 진짜 먹고 싶었는데. 대박!"
"다행이네요."
그녀가 마냥 해맑게 웃었다. 마치 옛날 노래 가사처럼, 그녀가 웃으니 나도 좋았다.
그리고 갑자기 카운터 근처에 있던 쿠키 하나를 내게 건넸다.
"저도 뭐 드려야겠다. 이거 받으세요."
"아뇨 괜찮아요. 파시는 건데."
"아니에요. 이거 곧 딱딱해져서 못 팔아요. 가시는 김에 가져가세요."
"아, 그럼.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갑작스런 선물교환 시간이 끝나고, 나는 잠시 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바깥 바람이 그녀 카페의 커다란 창문을 한번 때릴 정도의 찰나의 시간.
괜히 그녀와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 살이에요?"
"저 스물 아홉이에요."
"어, 저돈데. 친구네요."
"그러네요. 신기하다. 저보다 나이 많을 줄 알았어요."
내가 그렇게 노안인가? 하다가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니 마냥 즐겁기만 했다.
"동네 친구 생겼네요. 좋다."
"그러네요. 이 동네에 젊은 사람 별로 없는데."
"그래요?"
"아저씨 아줌마들이 훨씬 많아요."
가슴에서 무언가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곧 휘발될, 순간의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우리가 함께 보낸 겨우 한 순간이, 곧 몽글몽글한 일상이 될 것만 같았다.
"밥 한 번 같이 먹을래요?"
"좋아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그래서 오히려 짜여진 극본대로 연기를 하듯이 우리는 행동했다.
나는 그것이, 서로 마음을 숨기고 이 게임을 이어가려는 노력처럼 느껴졌다.
갑작스레 내비치면 상대방이 당황할 테니까, 조금만 천천히 나아가려는.
"전화번호 좀 줄래요?"
"아, 핸드폰... 번호 찍어 드릴게요."
"이름이 뭐예요? 전 MQ에요."
"전 NK요."
NK. 나는 그녀의 이름을 핸드폰에 저장했다. 그리고 멋쩍게 웃으며 가게를 나왔다.
"또 올게요."
"네, 또 오세요."
나가며 가게의 큰 창 너머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보고 있었고,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우린 서로를 보고 활짝 웃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