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웹툰남과 카페녀

첫만남 이야기

by 신MQ



"어서오세요."


갓 내린 커피에 시럽을 두 방울쯤 떨어뜨린 것만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

마스크 위로 보이는 크고 맑은 눈

은근하게 느껴지는, 이 공간에 완전히 익숙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까지


환하게 웃던 그녀의 눈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021년 2월, 스물여덟 살 나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사실 멀쩡한 직장은 아니었다.

대표는 투자를 받기 위해 거의 매주 새로운 IR자료를 요구했고

포괄임금제인 탓에 내 야근에는 값이 치뤄지지 않았다.

더욱 더 힘빠지는 것은, 밤을 새워가며 만든 자료들이 대부분 일회성으로 쓰이고 버려졌다는 사실이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근로의욕을 빠르게 떨어뜨렸다.

마침 그때 내게는 퇴사를 실행할 핑곗거리가 하나 있었다.


운 좋게 작년에 선정된 국가지원사업 덕분에 웹툰 스토리작가로 데뷔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약 반년 동안 준비했던 원고로 플랫폼 투고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이번에 준비하는 웹툰 대박 날 거라니까?"

"어차피 연재하면 돈 들어와. 회사 다니는 것보다 훨씬 낫지."

"네이버나 카카오페이지 가면 바로 대박이야!"


그 안일한 몇 마디가 내 계획이었다.

인터넷 기사에서 일류 작가들의 수입을 보면 그게 이미 내 돈 같았고

박봉인 회사는 하루 빨리 그만 두는 게 이득 같았다.


그만두겠습니다.
그만 두고 글쓰려고요.


그렇게 나는 호기롭게 퇴사를 했고 (물론 미리 말씀드리고 일처리 전부 끝낸 뒤에)

4월 말쯤, 글쓰는 친구들과 함께 을지로 근처의 한 골목에서 작업실을 얻었다.


KakaoTalk_20220905_004324537.jpg 작고 예쁜 우리 작업실과의 첫만남


한 지인분이 창고로 쓰시던 곳이었는데, 짐들을 그대로 두고 쓰는 조건으로 싸게 빌릴 수 있게 됐다.

친구 두 명과 월세를 나눠 내기로 하고, 회사를 그만 둔 나는 작업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글은 카페 테이블과 콘센트만 있으면 쓸 수 있는 것이었지만

매번 4,500원을 주고 빌리는 자리와,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공간의 차이는 꽤 컸다.


더군다나 그 공간은 나름대로 물성과 감성이 풍부했다.


그곳에는 지인분의 취향으로 채워진 책장이 있었고

언제든 장난삼아 눌러볼 수 있는 전자피아노가 있었으며

배고플 때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소형 버너와 냄비가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을 퍽 따뜻하게 해주었다.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도 좋았고.


coffee-2847957_1920.jpg


작업실을 구했다면 다음 스텝은 정해져 있었다.

바로 주변에서 싸고 맛있는 카페를 찾는 것.


작업실로 가기 전, 횡단보도 앞 커다란 빌딩 1층에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었지만 가격이 좀 비쌌다.

마침 지하철 역 근처에 양옆으로 소박한 개인카페가 두 개나 있으니 그곳들 먼저 가보기로 했다.


첫째 날, 길 왼쪽의 카페를 들렀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사장님이 조용히 커피를 내주셨다.

맛은 평범했지만 쿠폰이 귀여웠다. 이곳을 단골 삼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둘째 날, 길 오른쪽의 카페를 들렀다.

카페는 아주 좁았다.

건물 외관으로 보면 얼핏 장난감 같은, 폭이 좁은 네덜란드의 집 같았달까?


유리로 된 출입문 옆에 커다란 창이 나 있었고,

창 앞에는 새하얀 접이식 야외 테이블 하나와 접이식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창 너머로, 바 앞에 서 있는 사장님이 보였다. 여성분이셨다.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끼면서,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갓 내린 커피에 시럽을 두 방울쯤 떨어뜨린 것만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

마스크 위로 보이는 크고 맑은 눈

은근하게 느껴지는, 이 공간에 완전히 익숙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까지


"안녕하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네. 잠시만요."


가까이서 보니 내 또래 같았다. 잠시 알바생인가 의심도 했지만... 묘하게 느껴지는 지배력(?)이랄까, 분위기가 평범한 알바생은 분명 아니었다.


"우와 가게가 너무 예뻐요. 혹시 사장님이세요?"

"네 맞아요~ 감사해요."


물론 두 번째 질문이 핵심이었지만 인테리어 칭찬도 허언은 아니었다.


낡은 감각과 세련된 감각이 묘하게 공존하는 벽과 가구들의 색감도 좋았고

좁은 가게 곳곳에 감각적인 일러스트 포스터들,

계산대와 에스프레소 머신에 붙어 있는 귀여운 캐릭터 스티커들도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가게 구조가 굉장히 특이했다.


건물 폭이 지나치게 좁아 1층에는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예 없었다.

머신이 놓인 바를 빼면,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법한 공간의 복도가 있을 따름이었다.


복도 끝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혹시 2층 둘러보고 와도 될까요?"

"당연하죠."


계단을 걸어 올라간 2층에는 원목 테이블이 네 개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커다란 창문을 얇고 하얀 커튼이 가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내려앉는 빛이 유난히 따뜻하고 조용했다.

나는 내려가서 또 칭찬을 할 수밖에 없었다.


KakaoTalk_20220905_235514511_02.jpg


"와 2층도 너무 예쁘네요."

"감사해요. 자주 오세요." (웃음)


감사합니다. 자주 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던 그녀의 눈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니,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봐. 유달리 환하게 웃었다니까?

그러니까 그냥 손님한테 웃어주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고.

알겠다, 알겠어. 사실 나도 다 알아. 그런 거 다 아니고 그냥 착각인 거, 다 안다고.


그날 텀블러에 받아온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는 초콜릿 맛이 났다.

얼음이 녹고, 차가운 게 다 식은 다음에도 쌉쌀한 달콤함이 느껴졌다.


일단 단골 카페는 확실히 정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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