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도시 기행 03
무려 20여 년 전 썰이다. 나는 스리랑카 생활을 마치고, 두 달간 '런던 IN - 이스탄불 OUT'하는 나름의 유럽 일주 여행을 떠났다.
당시 10월 말에 도착해보니 체감상으론 겨울이었다. 스리랑카의 '여름-여름-여름-여름'에 길들여진 나는 오랜만에 추위를 느꼈다. 다행히도 여행 초반에는 그 추위가 싫지 않았다. 아무리 걸어도 땀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고, 머플러를 조이고 주머니에 깊게 손을 찔러 넣는 것도 어색하지만 좋았다.
하지만 스리랑카의 자취생활 중 삭을 대로 삭은 내 몸뚱이는 여행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숙박 포함 매일 17유로라는 비상식적인 예산도 큰 이유. 결국 파리에서 탈이 났다. 잇몸이 부어올랐고, 걷다 보면 금방 지쳐버렸다. 스리랑카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로 두툼한 외투를 걸쳤지만, 유럽에 가보니 초겨울에나 겨우 입을만한 점퍼였다. 거기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도 못해 타이레놀 없이는 잠 자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원래 계획은 프랑스, 스페인의 와이너리를 더 둘러보고, 포르투갈에 갈 참이었다. 그런데 숙소의 포르투갈 여행자에게 '우리 동네는 지금도 반팔 입는다.'는 말을 들었고, 그 길로 리스본 가는 기차에 올랐다. 스페인 국경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꼬박 하루가 걸려 리스본에 도착.
과연 듣던 대로 따사로운 햇살이 나를 반겼다. 반팔 까지는 아니라도 외투 없이도 충분히 거닐만한 날씨였다. 거기다 프랑스 대비 커피값이 절반일 정도로 물가가 저렴했다. 유럽에 온 후 처음으로 테이블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몸은 빠르게 회복됐다.
요즘이야 여행지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미리 알게 된다. 숙소 찾아가는 법은 수십 장의 사진을 보며 VR마냥 예행연습이 가능하고, 검색만 하면 식당 주인이 흡연자인지 인종차별 의혹이 있는지까지 다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당시는 가서 보는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은 당연히 없었고, 인터넷도 안되면 그만인 시절이었다. 내 여행은 온전히 론니 플래닛 유럽 편 한 권에 의지했다. 서, 동, 북유럽 전부를 단 한 권에 모았으니 그 내용은 매우 빈약했고, 요즘의 블로그 후기와는 그 친절함에서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아무 정보가 없이 도착한 리스본은 일단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청명했고, 온화한 날씨 덕에 외투를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얼마든지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유럽 분위기가 물씬 났다. 시내를 걷다 보면 내리막 길이 보이고, 거길 지나는 트램에 노을이 걸치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언제든 부담 없는 가격에 에스프레소 한 잔 하며 쉴 수 있는 여유는 덤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한국 여행객들이 반드시 거치는 곳은 아니었다. 이베리아 반도는 스페인 남부까지만 훑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난 어느 알록달록한 성 사진을 우연히 보고, 포르투갈에 가기로 결심했었다. 다만 그 성의 이름도, 그게 어디 있는지는 몰랐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냥 내 머릿속에 아련하게 남긴 사진 말고 다른 도구는 없었다. 리스본을 아무리 둘러봐도 그 성은 나타나지 않았고, 포르투엔 있으려나... 고민하던 차에. 론니 플래닛에서 추천한 근교 도시 신트라에 가봤다. 사실 딱히 할 것도 없고 해서 가본 것인데, 신트라 기차역에 도착하니 내가 그리던 성의 사진이 떡 하니 걸려있었다. 내가 포르투갈에 온 이유를 찾은 것이다.
그곳의 이름은 페나성(Palácio Nacional da Pena). 여타 유럽의 단단하고 육중해 보이는 성의 느낌은 아니다. 좀 투머치 하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이 가득하고, 외벽은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원색으로 꾸며져 있다. 아마 긴 시간 유럽을 여행했던 이들이게 이 페나성은 관심이 없거나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나에겐 동경하던 바로 '그곳'이기 때문에, 내 기준 여기가 유럽 넘버 원이다. 오르막 길을 천천히 오르며 성을 감상했고, 성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폈다.
배우자에게는 몇 차례 포르투갈 이야기를 했었다. '너무너무 좋은 곳'이라고. 그리고 결국 오는 9월 말에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포르투 5박 & 리스본 5박의 황금 코스. 거기다 비즈니스 클래스에 몸을 싣을 예정이다. 너무 심하게 사서 고생했던 유럽여행 중 만난 한줄기 빛 같았던 포르투갈. 그녀도 나처럼 포르투갈에서 따사롭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