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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라임 Jul 25. 2022

반갑지가 않아

백수로그 06


 이제 막 신입사원 딱지를 뗀 시절 야간에 수업을 듣는 경영대학원을 다녔다. 그때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수업을 듣으며 넋이 나간 후에도 술자리를 가지며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다. 많은 분들께 여러 도움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고마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분은 내가 뭐라도 여쭤보면,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다."라는 칭찬으로 대답을 시작했다. 내가 깊은 고민을 하거나 그럴싸한 식견을 갖고 묻지 않았음에도 늘 그렇게 하셨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는데, 그런 대화 스킬은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리고 '난 너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줘서 대화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당시 내가 겪는 갈등에 대해 듣고 해 주신 말씀도 아직 기억한다. "대화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계속되면, 아직도 대화가 부족한 거다."는 이야기다. 그 덕분에 나는 갈등의 대상을 '나와 안 맞는 사람'으로 쉽게 단정 짓지 않을 수 있었다. 상대의 입장을 더 가늠해보게 됐고, 그걸 기반으로 대화를 쌓아가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 이것은 미숙했던 사회인이었던 나에게 큰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요즘  형님이  수상하다. 국내 최고의 대기업 그리고 초대형 외국계 기업의 HR 담당이셨던 분이 현재는 강남에서 부동산 영업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형수님과의 사이도 문제가 있는  같고, 본인 표현으로는 한동안 생활보호대상자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사이 장난처럼 건넨 말에 소액을 송금하기까지 했다. (애초에 받을 생각은 없었어서  돈이 가치판단의 대상은 아니다.)


 업무시간에 걸려오는 전화가 늘었고 전화를 받으면 내가 끊기 전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투자는 공격적으로 해야 한다. 너 언제까지 남들처럼 살 거야!"는 부담스러운 조언도 해주신다. 그러다 보니 그분의 연락을 피하게 됐다. 문자는 답을 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다. 업무상 모르는 번호도 받아야 할 때가 있는데, 가끔은 처음 본 번호로 "형이야"하셔서 꽤 불편하기도 했다.


 대학원 시절 조언을 아끼지 않던 형. 나에게 건넨 무형의 유산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현재는 형님의 연락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가끔은 내가 그분의 배경(대표적으로 직장의 이름값)을 보고 따랐던 놈처럼 느껴져서 몹시 부끄러울 때도 있다. 끈 떨어지니 사람 무시하는 그런 거. 난 절대 아니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대단히 잘 나가는 친구보다 별일 없이 사는 친구가 편하고 오래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언제든 부담 없이 만나 치맥 할 수 있는 사이를 말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내 주위 사람들 모두 너무 잘 나가지도 말고 절대 망하지도 말라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나는 요즘 그와의 달라진 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고. 나는 그의 영업활동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본인의 인생을 성실히 살고 있는 것이겠지. 난 '손절'이라는 말 따위로 인간관계를 정리할 만큼 냉정하지 못하다. 안 그래도 시간 많은데, 다음에 걸려오는 전화는 꼭 받아야겠다. 그동안엔 서둘러 정리하기 바빴는데, 점심 뭐 드셨는지, 요즘 일은 잘 되시는지 여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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