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로그 06
이제 막 신입사원 딱지를 뗀 시절 야간에 수업을 듣는 경영대학원을 다녔다. 그때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수업을 듣으며 넋이 나간 후에도 술자리를 가지며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다. 많은 분들께 여러 도움을 받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고마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분은 내가 뭐라도 여쭤보면, "그거 정~말 좋은 질문이다."라는 칭찬으로 대답을 시작했다. 내가 깊은 고민을 하거나 그럴싸한 식견을 갖고 묻지 않았음에도 늘 그렇게 하셨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는데, 그런 대화 스킬은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리고 '난 너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인상을 줘서 대화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당시 내가 겪는 갈등에 대해 듣고 해 주신 말씀도 아직 기억한다. "대화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계속되면, 아직도 대화가 부족한 거다."는 이야기다. 그 덕분에 나는 갈등의 대상을 '나와 안 맞는 사람'으로 쉽게 단정 짓지 않을 수 있었다. 상대의 입장을 더 가늠해보게 됐고, 그걸 기반으로 대화를 쌓아가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 이것은 미숙했던 사회인이었던 나에게 큰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요즘 그 형님이 좀 수상하다. 국내 최고의 대기업 그리고 초대형 외국계 기업의 HR 담당이셨던 분이 현재는 강남에서 부동산 영업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형수님과의 사이도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본인 표현으로는 한동안 생활보호대상자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사이 장난처럼 건넨 말에 나는 소액을 송금하기까지 했다. (애초에 받을 생각은 없었어서 그 돈이 가치판단의 대상은 아니다.)
업무시간에 걸려오는 전화가 늘었고 전화를 받으면 내가 끊기 전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투자는 공격적으로 해야 한다. 너 언제까지 남들처럼 살 거야!"는 부담스러운 조언도 해주신다. 그러다 보니 그분의 연락을 피하게 됐다. 문자는 답을 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다. 업무상 모르는 번호도 받아야 할 때가 있는데, 가끔은 처음 본 번호로 "형이야"하셔서 꽤 불편하기도 했다.
대학원 시절 조언을 아끼지 않던 형. 나에게 건넨 무형의 유산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현재는 형님의 연락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가끔은 내가 그분의 배경(대표적으로 직장의 이름값)을 보고 따랐던 놈처럼 느껴져서 몹시 부끄러울 때도 있다. 끈 떨어지니 사람 무시하는 그런 거. 난 절대 아니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대단히 잘 나가는 친구보다 별일 없이 사는 친구가 편하고 오래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언제든 부담 없이 만나 치맥 할 수 있는 사이를 말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내 주위 사람들 모두 너무 잘 나가지도 말고 절대 망하지도 말라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나는 요즘 그와의 달라진 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고. 나는 그의 영업활동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본인의 인생을 성실히 살고 있는 것이겠지. 난 '손절'이라는 말 따위로 인간관계를 정리할 만큼 냉정하지 못하다. 안 그래도 시간 많은데, 다음에 걸려오는 전화는 꼭 받아야겠다. 그동안엔 서둘러 정리하기 바빴는데, 점심 뭐 드셨는지, 요즘 일은 잘 되시는지 여쭤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