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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라임 Jun 23. 2022

사랑의 증거

백수로그 EP 03


Kandy, Sri Lanka, 2004



 난 현재 무직이고 수입이 없다. 하지만 대출금의 원금과 이자는 매월 빠져나간다. 그리고 보험, 연금, 휴대폰 요금 등 매 달 나가는 금액이 상당하다. 이제 곧 그룹 PT를 재등록해야 하고, 9월이 되면 자동차 보험도 갱신해야 한다. 거기다 가끔은 백수 주제에 내가 한 턱 내야 할 때도 있다. 이것들은 순전히 내가 소비하는 것이다. 배우자와의 공동체를 위해 쓰는 아파트 관리비와 잦은 외식 비용, 그리고 쿠팡에 갖다 바치는 금액 또한 적지 않다.

 현재 이 모든 금액은 배우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나나 배우자 모두 정해진 금액으로 빠듯하게 소비해본 경험이 없어서 아직까지는 매 월 지출이 예산을 초과했다. 그럴 때마다 늘 사랑해마지 않는 배우자님께서 몇 십만 원씩 추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다.

 이번 달을 예로 들어보자. 이미 지난달에 마이너스인 상황이었고, 배우자는 말일에 생활비를 입금하여 5월이 시작되었다. 1일에 이미 미국산 소갈빗살과 된장찌개가 일품인 식당에서 6만 3천 원어치를 먹어치웠고, 돌아오는 길에 필라이트 두 통을 사 왔다. (이번 달 아껴보자며 그나마 발포주를 산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 그리고 다음날 쿠팡에서 4만 원상당을 지출했고, 곧이어 백화점에서 사촌 신혼부부를 위한 선물을 구매하는데 10만 원을 썼다.

 이와 비슷한 패턴으로 우리의 생활비는 줄줄 새 나갔고, 급기야 9일에 XX만원, 19일에 XX만 원을 추가로 수혈받았다. 배우자의 정식 월 급여일을 하루 앞둔 어제(30일). 일부 수당이 먼저 입금되었다는 소식에 우리는 냉삼과 생맥을 먹는데 7만 원을 썼고. 돌아오는 길에는 수입맥주 2만 원어치를 가득 싸들고 왔다. 냉정하게 '아직 정신 못 차렸다.'라고 보는 게 맞겠다.


London, UK, 2006


 자칭 '보릿고개'를 며칠 겪어봤지만, 우리의 생활비는 사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나는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다. 사지 못할 것은 없고, 다이어트를 위한 샐러드는 여전히 구독 형태로 받아보고 있다. 한우 대신 외국산 소고기를 사 먹고, 사고 싶지만 참는 것은 아이패드 급으로 비싼 것일 뿐인 상황을 감히 보릿고개에 비할 수는 없다. 우리 집안 경제에 좀 더 계획적인 지출이 필요한 상황이다.

입출금내역 안내
5/31 08:58
입금 X,XXX,XXX원


 자기반성을 하던 중 입금 문자를 받았고, 이내 배우자에게 "이번 달에도 사랑을 확인했어요."라고 했다. 이미 많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A가 B에게 매 월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송금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덕분에 난 이번 달에도 일시적으로 궁핍할지언정 필라이트 한 잔쯤은 언제든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증거는 많을수록 좋지만, 사실 특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자는 일터에서 얻은 고충을 풀어내며 필라이트 한 잔을 나누고, 화병을 새로 채운 꽃 한 다발에 행복해한다. 그리고 내가 구운 군고구마를 너무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최근엔 그 사소한걸 내가 받아주지 못했던 적도 있다. 그녀가 자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일터에 가 있을 때, 룰루레몬 운동복을 위아래로 입고 그룹 PT를 가자면, 가끔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이 힘들긴 한데, 그건 오롯이 나만을 위한 노동(?)이어서 말이다.

 내가 받는 사랑의 증거는 하루에도 수 십 건이다. 그녀도 나처럼 사랑의 증거를 여러 방면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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