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로그 EP 03
난 현재 무직이고 수입이 없다. 하지만 대출금의 원금과 이자는 매월 빠져나간다. 그리고 보험, 연금, 휴대폰 요금 등 매 달 나가는 금액이 상당하다. 이제 곧 그룹 PT를 재등록해야 하고, 9월이 되면 자동차 보험도 갱신해야 한다. 거기다 가끔은 백수 주제에 내가 한 턱 내야 할 때도 있다. 이것들은 순전히 내가 소비하는 것이다. 배우자와의 공동체를 위해 쓰는 아파트 관리비와 잦은 외식 비용, 그리고 쿠팡에 갖다 바치는 금액 또한 적지 않다.
현재 이 모든 금액은 배우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나나 배우자 모두 정해진 금액으로 빠듯하게 소비해본 경험이 없어서 아직까지는 매 월 지출이 예산을 초과했다. 그럴 때마다 늘 사랑해마지 않는 배우자님께서 몇 십만 원씩 추가 생활비를 지원해주신다.
이번 달을 예로 들어보자. 이미 지난달에 마이너스인 상황이었고, 배우자는 말일에 생활비를 입금하여 5월이 시작되었다. 1일에 이미 미국산 소갈빗살과 된장찌개가 일품인 식당에서 6만 3천 원어치를 먹어치웠고, 돌아오는 길에 필라이트 두 통을 사 왔다. (이번 달 아껴보자며 그나마 발포주를 산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 그리고 다음날 쿠팡에서 4만 원상당을 지출했고, 곧이어 백화점에서 사촌 신혼부부를 위한 선물을 구매하는데 10만 원을 썼다.
이와 비슷한 패턴으로 우리의 생활비는 줄줄 새 나갔고, 급기야 9일에 XX만원, 19일에 XX만 원을 추가로 수혈받았다. 배우자의 정식 월 급여일을 하루 앞둔 어제(30일). 일부 수당이 먼저 입금되었다는 소식에 우리는 냉삼과 생맥을 먹는데 7만 원을 썼고. 돌아오는 길에는 수입맥주 2만 원어치를 가득 싸들고 왔다. 냉정하게 '아직 정신 못 차렸다.'라고 보는 게 맞겠다.
자칭 '보릿고개'를 며칠 겪어봤지만, 우리의 생활비는 사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나는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다. 사지 못할 것은 없고, 다이어트를 위한 샐러드는 여전히 구독 형태로 받아보고 있다. 한우 대신 외국산 소고기를 사 먹고, 사고 싶지만 참는 것은 아이패드 급으로 비싼 것일 뿐인 상황을 감히 보릿고개에 비할 수는 없다. 우리 집안 경제에 좀 더 계획적인 지출이 필요한 상황이다.
입출금내역 안내
5/31 08:58
입금 X,XXX,XXX원
자기반성을 하던 중 입금 문자를 받았고, 이내 배우자에게 "이번 달에도 사랑을 확인했어요."라고 했다. 이미 많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A가 B에게 매 월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송금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덕분에 난 이번 달에도 일시적으로 궁핍할지언정 필라이트 한 잔쯤은 언제든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증거는 많을수록 좋지만, 사실 특정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자는 일터에서 얻은 고충을 풀어내며 필라이트 한 잔을 나누고, 화병을 새로 채운 꽃 한 다발에 행복해한다. 그리고 내가 구운 군고구마를 너무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최근엔 그 사소한걸 내가 받아주지 못했던 적도 있다. 그녀가 자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일터에 가 있을 때, 룰루레몬 운동복을 위아래로 입고 그룹 PT를 가자면, 가끔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이 힘들긴 한데, 그건 오롯이 나만을 위한 노동(?)이어서 말이다.
내가 받는 사랑의 증거는 하루에도 수 십 건이다. 그녀도 나처럼 사랑의 증거를 여러 방면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