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우산」과 영화 <4월 이야기>
우산
도종환
혼자 걷는 길 위에 비가 내린다
구름이 끼인 만큼 비는 내리리라
당신을 향해 젖으며 가는 나의 길을 생각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 만큼
시를 쓰게 되리라
당신으로 인해 사랑을 얻었고
당신으로 인해 삶을 잃었으나
영원한 사랑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삶을
되찾게 할 것이다
혼자 가는 길 위에 비가 내리나
나는 외롭지 않고
다만 젖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먼 거리에 서 있어도
나는 당신을 가리는 우산이고 싶다
언제나 하나의 우산 속에 있고 싶다
「우산」이라는 시는 교직 첫 발령을 받은 D중학교의 어느 교실 게시판에서 처음 보았다. 비담임이었던 나는 1학년 다섯 반과 2학년 두 반 체육을 가르치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엔 체육수업을 교실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2학년 4반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필기를 시킨 후 교실 뒤쪽으로 갔다가 게시판에 걸려 있던 「우산」을 읽게 되었다. 여학생 반이었고, 국어 선생님이 담임인 반이었다. 도종환 시인은 당시 유명인이었다. 시집 『접시꽃 당신』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시인이었다. 마지막 세 행이 강하게 가슴에 와닿았다.
출처 : https://hischarlie.tistory.com/23#google_vignette
이렇게 먼 거리에 서 있어도 / 나는 당신을 가리는 우산이고 싶다 / 언제나 하나의 우산 속에 있고 싶다
내겐 비 오는 날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수십 년의 세월이라는 ‘먼 거리에 서 있어도’ 나는 여전히 ‘언제나 하나의 우산 속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넓고 포근하고 안전한 우산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강남 신사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봐야 함바집이었다. 개발 붐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부모님은 한창 집을 짓고 있는 공사장에서 인부들을 대상으로 함바 식당을 하셨다.
신사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나는 계속 서초동의 신중국민학교를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 두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버스 노선은 있었다. 아홉 살 소년인 내게 버스는 무시무시한 공룡 같았다. 그 커다란 괴물을 타게 되면 아주 먼 나라로 데리고 가서 나를 내버릴 것만 같았다.
아홉 시까지 학교에 가려면 일곱 시에 출발해야 했다. 당시에 포장된 길은 드물었다. 나는 신작로나 산길 같은 길을 부지런히 걸어 다녔다. 풀숲이 무성한 길을 한참 동안 걷다 보면 신작로가 나왔다. 그때쯤엔 이슬로 흠뻑 젖어 있던 바짓자락에 풀씨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곤 했다.
나는 왕복 네 시간 동안 안전하게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내게 걸어 다니는 길은 안전한 땅이었지만 버스 타고 가는 길은 광대한 바다와 같았다. 내게 전자는 지도가 있는 곳이었고, 후자는 지도가 없는 곳이었다.
2학년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 시간 동안 걸어 다니는 것이 지겨워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버스가 공룡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버스를 타고 등교하기 시작했다.
버스 등굣길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어느 날이었다. 당시에 나는 차비하고 남은 돈으로 군것질하는 재미로 학교에 다녔다. 날마다 불량식품을 골고루 맛보는 즐거움은 아홉 살짜리에게 사는 낙이었다.
출처 : 괴산증평자치신문
그날은 장맛비가 하루 종일 내리던 날이었다. 여느 날처럼 나는 불량식품을 맛있게 사 먹고 차비 이십오 원을 주머니에 남겨 뒀다.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정류장까지 한참 동안 걸어가야 했다. 가방을 메고 우산을 든 채로 굴다리에서 막 빠져나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차비가 확인하고 싶어졌던 나는 주머니에게 동전 세 개를 끄집어냈다. 그 순간 동전들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꽉 움켜잡은 손아귀에는 십 원짜리 동전 하나만 달랑 남아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가방과 우산을 잡은 채로 정신없이 빗길에서 동전을 찾았다. 겨우 오 원짜리 동전 하나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리 흙바닥을 헤집어 봐도 10원짜리 동전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혼자 걷는 길 위에 비가 내린다 / 구름이 끼인 만큼 비는 내리리라
동전 찾기를 포기한 순간부터 아홉 살짜리는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엉엉 울면서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혼자 걷는 길 위에’ 먹구름이 계속 비를 쏟아부었고 온몸이 속절없이 젖어갔다.
울면서 한참을 걸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에는 막 하교한 듯한 여고생 누나들이 개나리꽃처럼 웃으며 재잘대고 있었다. 어느새 비도 그친 상태였다. 그 누나들을 보자 훌쩍이던 울음이 다시 통곡으로 바뀌었다. 저들 중에 누군가 나를 살려 줄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았다.
누나들 중에서 가장 예쁘고 착한―것처럼 보였던―누나 몇 명이 내게 다가와 왜 우냐고 물었다. 엄마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운 누나들이었다.
나는 울먹이면서 동전을 잃어버린 사연을 떠듬떠듬 말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누나들은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웃어댔다. 그중 한 누나가 나를 달래준 뒤 물었다.
“꼬마야, 너 몇 번 버스 타니?”
내가 훌쩍이며 버스 번호를 댔다.
“어머! 그럼 선미랑 같이 타면 되겠네.”
그 말에 선미인 듯한 누나가 착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혼자 가는 길 위에 비가 내리나 / 나는 외롭지 않고 / 다만 젖어 있을 뿐이다
그랬다. 그날 나는 외롭지 않았다. 다만 젖어 있었을 뿐이었다. 얼마 뒤, 버스가 왔다. 선미 누나가 같이 타라고 손짓하여 엉겁결에 버스에 올라탔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버스 안내양 누나가 차비를 달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내가 내릴 정류장에 도착했다. 언제 내렸는지 같이 탔던 누나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릴 때 안내양 누나는 차비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선미 누나가 차비를 대신 내주었음을 알고 안심했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가게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바지 주머니 속엔 불량식품을 사 먹을 수 있는 십오 원이 남아 있었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공돈까지 생긴 날이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 베스트 3’에 들 만한 날이었다.
출처 : 오마이뉴스
내 기억에 ‘비와 우산’을 소재로 한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영화는 <4월 이야기>이다.
주인공 우즈키는 도쿄의 무사시노 대학에 막 입학한 새내기이다. 일본의 새학기가 시작되는 4월에 우즈키는 벚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날 훗카이도에서 도쿄로 이사한다. 우즈키는 고등학교 때부터 짝사랑했던 야마자키 선배가 들어간 학교라는 이유로 죽을힘을 다해 공부해서 기적적으로 무사시노 대학에 합격한 것이었다.
우즈키는 입학하자마자 야마자키 선배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서점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려간다. 그날은 선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책만 한 권 사든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두 번째 서점에 간 날 마침내 선배를 만난다. 하지만 야마자키는 우즈키를 기억하지 못한 채 손님으로 대할 뿐이다. 야속한 마음을 안고 우즈키는 다시 돌아온다.
우즈키는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것 같지만 필요한 순간 내면에서 용기를 꺼낼 줄 아는 사람이다. 세 번째 서점에 간 날, 우즈키는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가리키며 야마자키에게 꺼내달라고 부탁한다. 야마자키로 하여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책을 꺼내 주게 함으로써 자신의 얼굴을 자연스럽게 각인시킨 것이었다.
그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카운터에서 책값을 받던 야마자키가 “혹시 키타 고등학교 안 다녔나요?‘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선배가 자신을 알아본 것이었다. 비로소 야마자키 앞에서 우즈키의 얼굴이 만개한 벚꽃처럼 활짝 피어오른다. 첫사랑이 막 피어오르는 순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자.
“나보다 일 년 후배였죠?”
“기억하세요?”
“네에. 이름이?”
“우즈키예요.”
“여기는 어쩐 일로?”
“무사시노 대학에 입학해서…”
“나도 무사시노 대야.”
야마자키는 우즈키가 자신을 짝사랑해서 무사시노 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다. 하지만 그도 분명 설렘을 느낀다. 우즈키에서 책을 건네며 근처에 사냐고 묻는다. 그렇다는 대답을 들은 후 이렇게 말한다.
“그럼 다시 한번 들러.”
왜 들르라는 것일까. 또 보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우즈키의 얼굴에서 기쁨과 설렘, 수줍음의 미소가 번진다.
서점을 나선 우즈키 앞엔 비가 내리는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비로소 비와 우산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야마자키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보고 우즈키에게 우산을 빌려주려고 한다. 우즈키는 비가 조금밖에 오지 않으니 그냥 가겠다며 자전거를 타고 떠난다. ---잠시 뒤 그녀는 자신의 선택―야마자키 선배의 호의를 거절한 것―을 후회한 것 같다.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져 내려 더 이상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우즈키는 자전거를 세워 놓고 일단 건물 현관 밑으로 몸을 피한다. 그때 우산을 들고 내려오던 교수가 비에 젖은 여학생에게 우산이 하나 더 있으니 갖고 가라며 친절을 베푼다. 뭔가 결심을 한 우즈키는 그 우산을 흔쾌히 받아 들며 감사를 표한다.
우즈키가 우산을 빌린 건 집으로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야마자키에게 가기 위해서였다.
당신을 향해 젖으며 가는 나의 길을 생각한다
우즈키는 빌린 우산을 쓰고 서점으로 돌아간다. 세찬 빗줄기 아래 우산 속에서 젖으며 가는 우즈키의 모습에서 떨림과 설렘, 어떤 의지가 엿보인다.
다시 서점에 도착한 우즈키는 야마자키에게 우산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야마자키는 들고 있는 우산은 뭐냐며 웃는다.
“이건 잠시 빌린 거예요.”
그 말속엔 ‘당신에게 우산을 빌리기 위해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출처 : 주간경향
우즈키는 야마자키가 서둘러 건넨 빨간 우산을 쓴다. 우즈키의 얼굴이 불그스름한 조명을 받은 듯 화사해진다. 우산살 하나가 빠져 있는 걸 본 야마자키가 다른 걸 주겠다며 일일이 우산들을 펼쳐 본다. 하지만 신통치 않은 건 매한가지다. 그냥 쓰고 가겠다고 한 뒤, 우즈키는 야마자키에게 “우산을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괜찮다는 선배에게 우즈키가 영화에서 가장 강한 어조로 말한다.
“아뇨. 돌려드릴게요.”
당신을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뜻이리라.
나도 당신을 사랑한 만큼 / 시를 쓰게 되리라
이제 두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고 아름다운 시―어쩌면 아름답기만 할 순 없는, 행복하고도 아픈 사랑의 시―를 써나가게 될 것이다.
당신으로 인해 사랑을 얻었고 / 당신으로 인해 삶을 잃었으나 / 영원한 사랑만이 / 우리들의 영원한 삶을 / 되찾게 할 것이다
어쩌면 우즈키는 야마자키로 인해 사랑을 얻고, 그로 인해 삶을 잃는 아픔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될 것이다.
이렇게 먼 거리에 서 있어도 / 나는 당신을 가리는 우산이고 싶다 / 언제나 하나의 우산 속에 있고 싶다
그리고 야마자키와 인생을 함께할 때도, 헤어져 먼 거리에 서 있게 될 때도 ‘언제나 하나의 우산―첫사랑―속’에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