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와 영화 '안녕하세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정현종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살아오면서 이따금 이런 의문을 갖곤 했다. ‘지구 여행자인 우리는 왜 이 땅에 태어난 것일까.’
대중가수 심수봉의 노래 <백만 송이 장미>는 이렇게 답한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을 들었다’고.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피어나는 꽃 백만 송이 장미를 피워내면 그리운 별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백만 송이는 80년 정도를 사는 인간이 매일 33송이 이상을 피워내야 가능한 양이다. 그러니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우리는 하루 동안 다정한 웃음을 건네주고 따뜻한 한마디 말을 보내주고, 온 맘으로 경청해 주고,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작은 손길을 건네주는 일 들을 통해 사랑이 꽃을 피워낼 수 있다.
매일의 목표로 삼고 부지런히 힘쓴다면 어찌어찌 서른세 송이를 피워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심리학에는 ‘5대 1의 법칙’이 있다. 상대를 격려하고 지지한 행동 5번이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며 상처를 준 행동 1번을 상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하루 동안 얼마나 자주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가. 5번의 사랑의 행위로 피워낸 꽃이 한 번의 부주의한 말로 사라져 버린다면 백만 송이의 꽃을 피워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된다. 어쩌면 장미를 피워내기는커녕 꺾어 버리며 사는 날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고 우리를 독려하고 있는 듯하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 불고 있다 /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 쑥쑥 자라고 있다
사랑한 시간이 없는 사람에겐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플라스틱 악기를 불고 있는 아이도 보따리를 들고 있는 아주머니도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시는 할아버지도 장미꽃 송이를 들고 다니는 처녀들도…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정현종 시인도, 대중가요 작사가 우리가 사랑하는 순간을 꽃이 피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을 접하면서 떠오른 분이 있었다. 그분은 암으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아이들을 향해 ‘사랑의 꽃을 피운’ 분이었다.
어느덧 이십여 년 전의 일이다. 함께 근무하던 사서 선생님이 암이 악화되어 휴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서실에 갈 때마다 항상 웃는 얼굴로 환대해주신 분이었다. 지난해 전근을 오시자마자 도서실을 뒤집어엎듯 깨끗하게 서가 정리를 했을 때도 이미 암세포가 재발한 상태였다고 했다.
출처 : 경기신문
그 당시 나는 학교의 상조회장이었다. 동료 교직원들에게 선생님의 상태를 알리고 치료비를 모금하는 일에 힘썼다. 교직원들이 모아준 모금액을 들고 교장 선생님 등 몇 분과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작은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실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검은 모자를 쓴 선생님은 몹시 마르고 여윈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형형했다. 선생님은 믿어지지 않는 미소와 따뜻함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담당의사가 병원에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서 한 달 전부터 집에서 지내고 있어요. 암이 뼈로 전이가 돼서 그동안 집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오늘 얼굴도 제대로 뵙지 못하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음식을 조금이라도 드셔서 몸에 힘이 생기셨다는 말을 듣게 되어 다행이에요”라고 말하면서도 ‘부질없는’ 말들이라고 느껴졌다.
그러다 도서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도서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선셍님은 전혀 다른 존재로 변모했다. 작년에 도서실의 서가들을 뒤엎어 정리했던 일과, 가을에 시화전을 열정적으로 준비했던 일들을 이야기할 때 선생님의 눈은 긍지로 가득했고 기쁨으로 들떴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는 암이 뼈로 전이되는 것도 모른 채 어떻게 서가를 뒤집는 대공사를 했느냐고 선생님을 나무할 수도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선생님과 방문객 ‘사이’에는 슬픔보다 기쁨이 더 넘쳤고 한탄보다 웃음이 먼저 터졌다.
교장선생님도 아버님이 뼈로 전이된 암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셨다. 그 고통을 알기에 교장선생님은 어떻게 아픈 몸으로 도서실 서가 공사를 했느냐며 안타까움을 토하셨다. 그때마다 선생님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도서실과 아이들을 위해 책 먼지를 마시며 대공사를 했던 일을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는 그것을 너무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도서실과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선생님의 눈에서 환하게 빛나던 행복 때문이었다. 거실에 가득했던 여름 오후의 눈부신 햇살 속에서도 선생님의 기쁨과 행복은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헤아릴 수 없는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말로 이상하고 놀라운 대화였다. 암이 온몸으로 전이되어 살 희망이 없는 분과 대화하는 내내 웃음과 기쁨이 넘쳐났다는 것이 말이다. 도무지 웃음이 날 수 없는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으나, 웃는 일은 선생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기도 했다.
한참 대화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덧 삼십여 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더 이상의 대화가 선생님에게 무리라고 느껴져 떠날 채비를 했다. 교직원들의 정성을 모은 봉투 드리고 난 뒤 선생님의 집을 나섰다. 선생님은 맑고 담담한 웃음으로 작별 인사를 건네주셨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선생님은 일 년 정도 투병을 더 하신 뒤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의 삶은 백만 송이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충분한 사랑을 세상에 남기셨다. 자신을 보호하는 일보다 아이들이 사랑하는 도서실을 만드는 일이 더 소중했던 분이었다. 암을 돌보는 일보다 학생들에게 사서교사로 기여하는 일이 더 중요했던 분이었다. 그분이 백만 송이의 장미를 피워내고 아름다운 별로 돌아가셨으리라 믿는다.
출처 : 나무위키
영화 <안녕하세요>에는 ‘죽을 용기’가 필요한 열아홉 살 여학생이 나온다. 어렸을 때 고아원에 버려졌던 수미의 삶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지옥이다. 고아원 원장은 폭행을 일삼으며 수미를 식당으로 내몬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술취한 손님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맞기까지 한다. 학교에서는 고아원 아이라고 무시당하며 학교폭력을 당한다.
수미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기 위해 다리 위 난간에 오른다. 그때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수미의 팔을 낚아채며 자살을 막는다. 호스티스 병원 수간호사인 서진은 수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니 잘못 아니야. 그게 무슨 일이 됐든.”
서진은 무슨 이야기든 다 들어주겠다며 수미를 식당으로 데리고 간다.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딸의 엄마였다. 식당에서 마주한 서진에게 수미가 말한다.
“아까 아줌마가 한 말 되게 무서운 말인 거 아세요? 죽을 용기로 살아보라는 말. 사는 게 죽기보다 더 힘들어서 죽는 거예요.”
서진은 명함을 내밀며 호스피스 병동으로 수미를 초대한다. ‘죽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는 말에 끌린 수미는 며칠 후 병원을 찾아가게 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주한 환자들의 밝은 모습에 수미는 크게 놀란다.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하루를 살고 있었다. 커피를 내리는 신혼부부, 소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작가, 그림 그리는 전직 화가, 영어 공부하는 아주머니, 한글을 배우고 있는 할아버지 등등.
수미를 집으로 데리고 간 서진은 ‘죽는 법을 알아낼 때까지 이 집에서 지내라’고 말한다. 대신 청소하고 빨래하고 병원에서 자원봉사도 하는 게 조건이었다. 다음 날부터 수미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를 시작한다. 그곳에서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환자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호스피스 병동의 ‘죽어가는 사람들’이 ‘죽고 싶은’ 수미에게 삶의 온기를 나눠 준 것이었다.
수미의 첫 번째 미션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인수 할아버지에게 ‘한 달 안에 한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서 수미는 조금씩 ‘살아 나가야 할 이유’를 배우게 된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 바빠 보인다’는 수미의 물음에 할아버지가 답한다.
“바쁘겠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지 다 알고 있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죽고 싶었던 자신과 달리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어떤 일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무얼 제일 하고 싶냐”는 인수 할아버지의 물음에 수미는 딱히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수미에게 강하게 말한다.
“왜 없어? 다 죽어가는 사람들도 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저렇게 열심히들 사는데. 살아있을 때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랬다.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들은 죽음에 무릎 꿇는 대신 새 목표를 세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죽고 싶었던 수미는 자신에게 매일 사탕을 건네주었던 할머니의 죽음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어느 날 아침 할머니 병실에 들어선 수미는 이불이 곱게 접혀 있는 것과 휠체어가 비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서진에게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난 수미는 서진의 품에서 오열하며 말한다.
“저 어떡해요? 인사도 못 드렸는데…”
수미는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죽음이 어떤 모습인지 비로소 보게 된다.
‘미래의 나에게 편지 쓰기’ 행사가 있던 날 인수 할아버지가 동료들에게 말한다.
“딱 한 번만 경험한다고 하면 이 한 번의 죽음이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지금 바로 이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그 행사를 지켜보고 난 수미가 서진에게 말한다.
“오늘 발표하는데, 다들 모두 행복해 보여서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 보따리에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정현종 시인은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비닐 보따리 안에서 ‘막무가내로 피어나는’ 밤꽃을 본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어김없이 사랑하는 순간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어느 곳보다 행복한 웃음꽃이 피어나기도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체험을 통해 수미는 자신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에겐 사랑할 시간이 여전히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수미는 서진네 집에 방치되어 있던 화분들을 돌보며 생명을 되살려낸다. 이제 수미는 식물을 돌보듯 자신을 돌보며 살아갈 것 같다.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수미는 한 할머니의 편지를 대신 읽는다. 수미가 읊조리듯 첫 구절을 읽는다.
“안녕하세요.”
출처 : MBC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나는 수미의 다음 말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죽음이 아니라 삶을 선택할 거예요. 이곳에서 죽음 앞에서도 사랑을 꽃처럼 피워낼 수 있다는 걸 배웠거든요. 저는 자신을 사랑하고 제게 소중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거예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