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기로 만든 200달러 티셔츠

아픈 교훈은 더 큰 아픔을 막는 방패가 될지도 몰라.

by DDOBOM


'이게 뭐지?'


미국 7일차, LA 호스텔에 와서 처음으로 세탁을 한 날이었다.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방으로 들어와 확인했는데, 빨래에 붉은 점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세제는 어느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내 빨래에만 이상한 게 섞여 들어갔을 리 없었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유를 찾을 생각도 못 하고 주인아주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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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내자 쿵쿵 쿵쿵, 2층에서 주인아주머니가 허둥지둥 내려오셨다.

아주머니는 방에 들어오셔서 빨래를 확인하시고는

"어머, 또봄 씨! 빨래가 왜 이래!"

하고 놀라셨다.

나는,

"모르겠어요, 이게 뭘까요?"

울상을 지으며 옷을 한 벌씩 살펴봤다. 가뜩이나 한여름 옷만 가져온 탓에 LA 온 첫날에 추워서 산 옷들도 있었고, 그중에는 고심 끝에 산 티셔츠도 있었다. 나름 요즘 길거리에서 자주 보이는 브랜드길래 큰마음 먹고 샀는데,

'하필이면 흰 티에 이게 뭐야. 어떻게 해...!'

여전히 울상인 채 뒤적거리며 하나라도 건질 옷이 있나 더 살펴보고 있던 그때, 진짜 문제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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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세탁기 앞에서 어떤 신사분이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에 문제가 생겼다는 듯, 뒤적였다. 낌새가 이상해서 아주머니와 함께 세탁기 앞에 가서 확인해 보니 나랑 똑같은 얼룩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식은땀이 서서히 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세탁기와 건조기를 살펴보시더니 범인을 잡아내셨다.

"이거네!"

립스틱 대신 자주 썼었던 버츠비 컬러 립밤이 아주머니 손에 있었다. 공기처럼 가벼워진 립밤을 열어보면서 건조기에서 녹은 립밤이 얼굴에 번지기라도 한 듯 새빨개졌다.

'아...'

식은땀이 폭발했다. 나는 연신 허리를 숙여가며 사과드렸다.

"으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

출장 차 미국에 왔다는 신사분은 옷을 확인하면서

"어휴... 다 묻었네."

하고 한숨을 쉬셨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알고 보니, 청바지 주머니에 립밤을 넣고 빨래를 돌렸고, 그게 건조기까지 들어간 바람에 립밤이 다 녹으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나마 건조기를 재빨리 확인해서 립밤을 발견하고 뺐으면 됐는데 얼룩을 보며 당황해하는 사이 다음 사람이 건조기를 이용했고, 민폐끼치는 칠푼이 팔푼이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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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위에 붙어 있지만 성능이 좋지 않고, 원래 색깔로 돌아갈 기미도 안 보이는 얼굴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똑똑, 문을 두드리니 달칵, 문이 열리며 아까보다 심각해진 것 같은 신사분이 나왔다. 나는 쥐구멍을 찾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너무 죄송해요. 옷은... 변상해 드리려고 하는데, 혹시 생각하신 금액은 있으세요?"

"속옷은 괜찮은데, 셔츠는 산 지 얼마 안 된 브랜드라 좀 비싸요... 흠..."

그분도 꽤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쓱 봤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 진짜. 어떡해, 망했다.'

살인적인 교통비에 밥값도 아껴가면서 다니는 마당에 이렇게 돈을 크게 쓰게 되다니.

"20~30만 원 정도면... 괜찮으실까요?"

한 글자 한 글자에 가시로 목이 찔리는 것 같았다. 그분은 내 얼굴을 쓱 훑어보더니

"그럼... 30만 원으로 하죠."

라고 했다. 순간 헉, 했지만 티 안 내려고 용썼다. 사람이란 참 간사해서 잘못했을 땐 누가 내 사정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세상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 게다가 잘못도 명백히 밝혀진 판에 깎아 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락된 것에 의의를 두고 대답했다.

"네네,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200달러 인출해서 드릴게요!"

그러나 그날 아침은 마가 껴도 제대로 낀 바람에 미국 여행 때문에 새로 발급했던 체크카드의 ATM인 출 방법을 제대로 이해하질 못하고, 점점 더 마음은 급해져서 몇 차례 같은 시도만 하다가 실패했다. 결국 한국 계좌로 30만 원을 이체해 드렸다.

'그냥 처음부터 30만 원 한국 돈으로 이체해 드릴 걸. 꼴사납게 아침부터 땀만 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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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마당에 주차해둔 차 옆에서 30만 원이 이체 된 걸 확인하고 기분 좋게 아울렛으로 쇼핑하러 가셨다. 난 그제야 식은땀을 닦으며 한숨 돌렸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게 있었다면 그분이 공식 일정은 다 끝나 셔츠를 입을 일이 없었다는 거다. 그날 아침에 비즈니스 미팅이라도 있는데 내가 셔츠를 다 버렸다? 아, 제발. 상상만으로도 나가 죽을 일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디(앤 해서웨이)도 아니고, 상대가 원하는 걸 열지도 않은 상점에 가서 구해올 재주도 없는데 그쯤에서 끝나길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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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안으로 들어와

"잘 끝났어요."

라고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슬쩍 내 곁으로 와서 물어보셨다.

"어떻게 됐어?"

200달러 보내드렸다 하니, 아주머니는 조금 깎아달라고 하지 그랬냐면서,

"예전에 어떤 손님은 여권도 돌린 적 있어. 그거 여권 꾸깃꾸깃해져서는 펴지지도 못해서 난리 났었는데 자기는 그만하니 얼마나 다행이야. 별일이 다 있어. 차 키 같은 거 돌리는 사람도 있고, 더 심각한 경우도 많아. 자긴 이제 나도 못 잊겠다. 나중에 또 와도 200불짜리 티셔츠라고 하면 딱 기억날 거 같아~. 호호호."

하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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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돌아와 외출 준비를 하는데,

'옷 돌릴 땐 항상 주머니! 바지 주머니 확인하고 돌려, 알았지?'

아버지가 늘 하던 잔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잔소리가 아니라 금기였다는 걸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집에서 새는 바가지 멀리 나온 만큼 더 깨져버렸다. 집에는 건조기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살면서 금기를 어겨도 기껏해야 조각난 영수증을 떼내거나, 신용카드를 세척하거나, 뭐, 가끔 시계도 망가졌지만 값비싼 시계는 아니었으니... 타격이 크진 않았다. 그렇게 방심하다 건조기가 있는 곳에서 무심코 금기를 어겼고, 아침 댓바람부터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출금된 잔고만큼 자책감이 입금되었다. 30만 원, 달러 환율로 치면 200달러. 적은 돈이 아니었다.

'30만 원이면 2~3일 치 우버비, 디즈니랜드 티켓값, 한국이었으면 한 달 통신비, 교통비, 커피비를 다 합친 돈인데... 라스베이거스에서 1박 하고도 남을 돈인데..! 그걸 이렇게 한 번에 쓰다니...ㅠㅅㅠ'

속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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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한동안 세탁기 돌리기 전에 바지 주머니를 꼼꼼히 봤다. 그런데 정말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별일 없다 싶어 다시 예전처럼 확인하지 않고 빨래를 돌리게 됐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몇 주 뒤, 립스틱 하나를 또 해먹었다. 건조기는 없어서 LA와 같은 참사는 아니었지만 갖고 있는 립스틱 중 나름 고가의 립스틱 모가지를 끊어버렸다. 립스틱 암살자도 아니고. 하지만 딱히 스스로가 밉다거나, 노 답이라거나, 괘씸하거나 한심스럽지 않았다. 그냥,


'그래, 인간아. 집에 건조기 없어서 다행이다!'


하고 웃어넘겼을 뿐이다. 200달러나 지불했는데도 또 그랬다는 게 좀 한심하긴 하지만 다행히도, 그 이후로는 진짜 고쳤다. 주머니 있는 옷은 철저히 몸수색을 마치고 세탁기에 입장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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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립밤이 묻은 옷 중 차마 버리지 못했던 흰 티셔츠는 이제 나만의 명품이 되었다. 때때로 얼룩은 신경 쓰지 않고 집 밖에도 입고 나간다.


티셔츠를 볼 때마다 떠올린다. 30만 원은 여전히 나에게 큰돈이지만 그 일이 아니었다면 세탁기에서 아이팟을 수장시켰을지도 모를 무심함을 고치고,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와 DIY 티셔츠 얻는 값치곤 나쁘지 않다고.


날씨 더 추워지기 전에 내일 한 번 더 꺼내 입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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