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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BOM May 10. 2024

취향, 존재만으로도 니치향수

사회 초년생일 때, 옆 팀 디자이너 대리님과 옷과 관련된 얘길 하다가, 이런 얘길 들었다.

"또봄 씨도 옷에 취향이라는 게 있어요?"


옷을 개성 있게 입거나 잘 입는 편은 아니고, 주로 회색 슬랙스에 아이보리빛 블라우스만 입고 다니기도 했고, 당시에는 색, 실루엣, 질감 등 옷의 특성과 내 체형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게 대리님 눈에는 더 잘 보이셨는지, 취향이라는 게 있냐고, 물으셨던 거 같다.


취향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보자면 물건과 서비스를 선택하는 자신만의 기준, 정도라고 내리겠다. 대리님에게 그 질문을 받을 시절에 내 취향은 ‘단정' 정도였다. ‘단정’이 스타일이 아니라 취향이라고 인정해 준다면 말이다. 당시 내게 옷은 '단정'하게만 입으면 되는 거고, 운동화는 밑창이 닳으면 바꾸는 것이고, 가방은 회사용 크로스백 하나, 백팩 하나, 캐주얼 크로스백 정도만 있었다.


나만의 스타일이랄 게 없었다. 특히 패션은 더 그랬다. 그래서 회사 갈 때는 모나미 볼펜 스타일을 고수했는데, 신경 써서 입기 싫지만 가장 깔끔하게 보일 수 있어서였다. 늘 밝고 품이 넉넉한 티셔츠와 맨투맨에 청바지나 반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나의 이런 무성의(?)한 패션에 대해 쪼꼬미 친구는

"옷 그렇게 입을 거면 그 키 나 줘!"

라며 답답함에 역정을 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의 월급은 진짜로 코딱지만 해서 그걸 홀랑 옷 값으로 써버리고 싶지는 않았고, 딴에는 유행을 탈만한 요소가 있는 옷은 되도록 사지 않았는데 유행 지났다고 옷을 버리는 건 어쩐지 환경오염을 가속화시키는 것 같았어 찜찜했다. 한동안 주말 약속 용으로 캐주얼한 옷을 따로 사지 않다가 그나마 몇 벌 있는 주말용 옷이 다 세탁기 속에 있던 날, 출근룩으로 입고 데이트를 갔다가 상대방에게 출근하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취향보다는 스타일 정도만 겨우 고수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소비도 경험이라고, 조금씩 써보면서, 유행에 따라 의도치 않게 의도치 않게 비율이나 실루엣을 다양하게 입어보면서 나름의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옷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하나씩 취향을 만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내 취향에 대해 알아갈수록 나는 패션에 대한 취향보다 필기구에 돈을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다.


예를 들면, 옷은 하의는 검은색을 주로 입고 상의는 자유롭게 배색한다든지, 가방은 포인트로 색감을 준다든가, 향수는 달지 않고 산뜻한 플로럴을 뿌린다든가 하는 식이다. 필기구는 볼펜보다는 잉크펜이, 잉크펜보다는 만년필을 좋아하고, 탁탁탁 큰소리가 나는 청축 기계식 키보드보다 도각도각 소리가 나는 저소음 기계식 키보드를 선호한다.


적어놓고 보니 꽤 되지만, 근사한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취향이 있는 사람은 ‘트렌드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선망이 되는 사람’으로 정의되면서부터 누군가가 동경할 만큼 멋지지 않으면, 미친 듯이 덕질하지 않으면, 눈에 확 튀지 않으면, 드러내지 않으면 자기 주관이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멋진 취향’을 가진 사람 앞에서 때때로 주눅 들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취향이 있는 사람’이 화두에 오르기 전에도 취향은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있었다. 누군가 따라 하고 싶어 한다거나 멋있어 보이지 않아도, 인터넷에 인증하지 않아도, 미디어에서 취향이 있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떠들어대기 전부터도 취향은 계속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무언갈 사게 된다면 최대한 내 멋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 테다.


켜켜이 쌓여가는 선택이 하나, 하나 모여 일관되게 유지되면 그것이 취향이고, 그 자체로 나의 니치향수가 되어 나만의 분위기를 만들어 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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