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는 보가트(Boggart)라는 마법 존재가 나온다.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에서 루핀 교수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무엇인지는 알지만
보가트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 계속 변신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대가 두려워하는 사물로 변신하는데, 루핀 교수는 보가트를 꺼내기 전
학생들에게 보가트를 상대할 마법 주문을 알려준다.
따라 해 봐, 리디큘러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중에서...
학생들은 “리디큘러스!"라고 큰 소리로 따라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말 보가트를 상대하려면 주문을 외치면서 한 가지를 더 해야 한다.
웃기는 놈으로 변신까지 시켜야 보가트를 이길 수 있다.
이제 가르쳐 줄 건 다 가르져췄다.
연습은 없다. 바로 실전이다. 아이들은 한 줄로 줄을 서고, 한 명씩 앞에 서서 자신의 두려움과 마주한다.
가장 처음 해보는 네빌 롱바텀은 루핀 교수의 지시에 따라 스네이프 교수에게 할머니 옷을 입힌다.
지금 보니 호그와트 교육과정이 각박하다. 입학부터 졸업까지가 10세에서 17세인데 공포를 마주하라니, 정신과 치료라고 해도 너무 극악 처방이다. 다행히 수업은 뒤로 갈수록 두렵고 떨리던 분위기에서 깔깔거리는 소리로 가득 찬다.
(이 장면은 해리포터 차례가 됐을 때, 루핀 교수가 보가트가 볼드모트로 변할까 아차 싶어 앞을 가로막다가 보름달로 바뀌게 되면서 급히 수업을 마무리 짓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는 루핀 교수가 늑대인간이란 단서를 흘리는 결과로 이어지고, 그는 끝내 교수 자리를 잃고 호그와트를 떠나게 된다.)
처음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볼 땐 시리우스 블랙(게리 올드만) 아저씨의 거지꼴을 하고도 뚫고 나오는 미모와 그의 등장으로 어두운 분위기로 급격하게 변해가는 스토리 라인에 심취해 별생각 없이 넘겼다. 그러다 언젠가 해리포터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유튜브에서 보가트 씬을 보고 자꾸 상상해 보게 됐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처음 봤을 시절에 보가트 앞에 섰다면 무엇이 있었을지, 지금은 무엇으로 보가트가 변신할지, 네빌처럼 용감하게 '리디큘러스!'라고 외칠 수 있을지, 외친다면 보가트는 뭘로 변할지,
궁금해졌다.
론은 거미가 나와도 거미발에 롤러스케이트를 신기던데, 난 바퀴벌레가 나오면 리디큘러스고 나발이고 아무 생각도 못하고 지팡이 던지고 도망갈 것 같다. 그럼 네빌처럼 앞에 싫어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뭘로 변신을 시켜줄까? 아직은 웃긴 모습으로는 변신시켜주기 어려울 사람도 많은데, 흠...
적어놓고 보니 큰일이다. 이런 식으로는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에서 낙제 확정이다. 무서워서 재수강도 못할 텐데, 안 돼, F라니! 내가 F라니!
머리를 더 쥐어짜봤다.
내가 앞에 선다면 보가트는... ’아무것도 못 하는 나’로 변신할 것 같았다. 외국어도, 국어도, 운동도, 사교성도 좋은 내가 되고 싶으니 반대 급부로 그 모든 걸 다 못하는, 무능한 나로 변신해 내 피를 말리려 들었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스무 살 언저리부터 외국어, 국어, 여러 가지 프로그램, 포트폴리오를 위한 SNS 인증 등 뭔가 끊임없이 ‘스펙’을 쌓지 않으면 낙오될 것 같았다. 나는 너무 많은 공을 저글링 하느라 계속 땅에 떨어뜨리고, 줍느라 바쁜 피에로가 되었고, 공을 더 잘 굴리고 싶을수록 뭘 해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한 가지라도 선뜻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취업하고, 나름 혼자서 자립 기반을 다진다고 다지게 됐을 때도 보가트는 때마다 순식간에 변신했다. 자소서, 탈락, 면접관, 직장 상사,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부모님 등등... 그 어떤 보가트보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부러워하면서 갈증과 허무함에 풀이 죽은 나’의 보가트는 강력했다. 그 앞에서 매번 얼어붙어 주문 한 번 외치지 못했다.
거기에 첫 취업 연령은 점점 높아지는데 반해 은퇴 연령은 낮아지고, 연금은 고갈되고 있는데 받기까지 공백 기간을 메울 일자리는 변변치가 않다는 뉴스와 실제 회사 생활을 거치며 껍데기만 추구하는 어른들을 마주할 때마다 무기력증과 환멸마저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리디큘러스’를 외칠 수가 없었다. 내가 리디큘러스를 외치려 해도, 보가트는 빠르게 바뀌는 보가트 앞에서 어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반복되는 낙담은 ‘자기 불신과 무력감’이 되어 회사를 나오고 반 년이 넘도록 선뜻 구직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건 이성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무의식 데이터, 일명 ‘감’이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저주(?)의 서막이 될 것이라 알람을 계속 울렸다.
환기도 시킬 겸, 일을 바꿔보기로 했다.
외국어도, 가사 쓰고 싶단 생각도, 브런치가 열려서 그렇게 쓰고 싶던 일이나 일상 에세이 등 이런저런 작은 공들도 모두 한데 모아 ‘필요할 때 꺼내볼 상자’에 넣어두고, 근사하게 잘 해내고 싶은 피에로 분칠도 지워버렸다. 크고 무거운,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시험’이란 공 하나만 들고 그걸 굴려보기로 했다.
도서관 열람실로 출퇴근을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처럼 따지지도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시간을 제일 아끼는 방법은 찍먹이라도 해봐야 한다는 걸 알려주기도 했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전처럼 많은 공을 저글링 하면서 괴롭고 싶지는 않은 이유도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자기 버릇 개 못 준다고, 가뜩이나 안 풀렸던 인생이 더 엉키는 건 아닐지 무섭기도 했고, 왜 더 빨리 시작하지 않았지, 하고 후회도 되고, 처음 보는 내용이라 막막했다. 그때마다 보가트는 덜컹거리며 마음속 장롱 깊숙한 곳에서 소리를 냈지만 그냥 그럴 때마다 ‘불안하나 안 불안하나 어차피 오늘은 여기까지 밖에 못 봐.’ 인정해버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루에 볼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고 나니 넘으려 아등바등하지 않게 됐다. 오늘 하기로 한 분량을 착실하게 봤으면 그걸로 됐다고 자정이 넘은 시간을 보내주었다. 그러자 케케묵은 ‘자기혐오와 무력감’은 ‘오늘 볼 수 있는 분량은 여기까지야’라고 하루치 한계선 안에서 한 단어씩, 한 지문씩, 하루씩 옅어졌다.
***
보가트는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르고, 같은 사람 앞에서도 끊임없이 바뀐다. 싫어하는 교수님일 수도 있고, 징그러운 거미일 수도 있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약점이 들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어떻게 변신을 하든, 겁을 주긴 하지만 상대를 직접 해칠 수 없다. 해치지 않는 게 아니라, 해칠 수 ‘없다.’
그러니 일단 무서워도 눈 똑바로 뜨고 안 무서운 척,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우아하게, 혹은 단호하게 지팡이를 뻗으며 ‘어떻게 해야 우스워지지?’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리디큘러스!”
하고 주문을 외치면 된다.
나는 머글(마법 능력이 없는 사람)로서 머글 세계에 살고 있으니 내 전용으로 저번 시험을 통해서 알게 된 걸 응용해서 나만의 리디큘러스를 만들어본다.
지난 몇 개월을 도서관에 있으면서 ‘지난날과 다가올 날을 들볶지 않고, 7번 문제를 푸는 지금 7번 문제의 지문을 뚫어져라 읽는’ 리디큘러스를 만들었다. 비록 내 안의 피에로는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저글링을 돌리던 버릇이 있어서 영화처럼 확 바뀌진 못했지만 그래도 몇 달이 지나자 ‘누군지도 못 알아보겠을 초라하게 늙은 나‘가 아니라 ‘도서관에서 내일도 문제집에 코를 박고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나‘로 바뀌었다. ‘안경 쓰고 집게 핀으로 틀어올린 머리를 쥐어뜯는 내일의 나‘는 제법 웃겼다.
이제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의 낙제 탈출 기미가 보인다. 한 번 더 나의 주문을 곱씹어 본다. 하나, 시험, 상사, 화내는 부모님, 나 자신에게 실망한 나 등 보가트가 나타나면 정신줄을 꽉 잡고, 눈을 똑바로 뜬다. 너무 징그럽지만 어차피 그놈은 날 잡아먹을 수 없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둘, 웃긴 모습을 상상한다. 보가트가 얼굴을 들이밀기 전에 재빨리 주문을 질러야 하므로 지난날을 탓하거나 너무 먼 미래를 고민할 만큼의 시간은 없다. 가장 최근에서 힌트를 얻는 게 효과적이다. 그리고 나면 셋, 주문을 지른다. (머글 세계니까 경우에 따라 꼭 소리 내서 외치진 않아도 유효한 걸로 하자.)
물론 이렇게 주문을 만들어도, 인정욕구는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는 과정에서 경쟁은 어쩔 수 없으며, 바퀴벌레가 안 무서울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보가트는 언젠가 또 상자 안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구현해 볼 ’리디큘러스’가 있다. 서툴러서 한 번에 안 바뀔 수도 있지만 바뀔 때까지 가급적 자주 해보는 건 할 수 있지 않을까?
해리포터 속 마법사들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고, 턱을 들어 올린 채, 두려움을 유머로 바꿀 상상을 하면서.
*ridiculous :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영화 이미지 출처 :
https://youtu.be/qZhrF0Tf65Y?si=BicvAKrS_DmxJK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