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일주일에 하나의 글은 써야지.’가 어느새 한 달에 글 하나로 바뀌고, 어느새 약 4개월가량 글을 쓰지 않았나 보다.
변명을 하자면, 처음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나의 작은 목표이자 희망이 어느 순간 헛된 희망처럼 느껴졌고 작가의 서랍 속 저장되었던 글들이 하찮게 보였다.
어릴 적에야 꽤나 글재주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내가 글재주를 위해서 언젠가 노력한 적이 있던가? 그렇게 좋아하던 독서도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다시금 하기 시작해놓고, 다른 사람을 위로해줄 만한 글재주가 내게 있는가?
이런 고민들 탓에 의식적으로 브런치 어플을 안 보이는 곳에 치워놓고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 결국에는 마음먹은 일들을 쉽게 포기해버리고야 마는 내 모습을 인정하면 상처받게 될 나의 자존감을 위해 약 27년간 쌓아온 나의 자의식 과잉이다. 또 또 그놈의 자의식 과잉.
약 2-3년 전의 나와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아주 활기차고, 긍정적인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내가 쓴 글만 봐도(글이 몇 개 없긴 하다.) 나의 기질에는 우울감의 비율이 높은 듯하다. 내가 존경하는 직장 상사는 내게 비타민 같은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 한편에서 스스로 상처 입히고 또 상처받는 나를 나는 알기에 사람들은 모두 나처럼 2개 이상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꽤나 우울하고 감정적이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마다, 나도 사랑이 충만하고 세상을 삐뚤게 보지 않는 사람으로 개조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사람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피부에 자주 두드러기가 나고, 뒤집어지는 날이 많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의원을 방문했는데, 매우 친절하신 한의사님은 1시간가량 이것저것 물어보고 설명하며 진료해주셨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나의 기질에는 분노나 기쁨보다 우울함이 더 많고 정신은 육신을 지배하기 때문에 우울감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하셨다.
사실 요즘의 나는 나의 우울감이 내가 성장할 만한 원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내가 타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집에 돌아와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며 우울에 빠질 때 내 마음은 물론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났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내가 부족한 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계기들이 비록 나만 알 수 있는 소소한 성장만을 이끌어냈다 하더라도 그 작은 성취가 너무 귀해서 이제는 우울감에 빠져 사색에 잠기는 시간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기질을 타고난다. 긍정, 사랑, 신뢰와 같은 것들이 꼭 아름다운 정체성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분노, 질투, 우울 등의 기질을 발판 삼아 마구 딛고 올라가서 행복의 깃발을 들어보자. 약자라고 치부되는 사람들의 성공은 언제나 통쾌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