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시의 스파이더맨이 클리프행어로 한걸음 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스파이더버스 시리즈의 두번째 영화이자 새로운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 새로운 <다크나이트>라는 외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전편 역시 특출난 연출과 예상을 뛰어넘는 각본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는데요. 제가 느끼기에는 2편이 더 짜임새있고 압도적이었습니다. 외신의 찬사가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고 느꼈고 한번 더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전편에도 화려하고 만화를 연상케하는 창의적인 연출을 보여줬었는데요. 이 특징적인 연출도 더 발전했으며 주제 의식도 전편보다 무겁고 심오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유머와 재치있는 대사, 장면은 그대로고 악역도 더 매력있어 영화가 종합적으로 한층 업그레이드 된 느낌입니다. 유명한 영화의 장면이나 전개를 오마주하는 모습도 보였는데요. 그러면서도 이를 조금씩 비틀어 영화를 더 독창적으로 만들어 주었어요. 훗날 2020년대 역사에 남을만한 만화영화를 꼽는다면 반드시 언급되야 할 영화의 수준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먼저 영화의 등장인물들의 개인 서사를 하나씩 짚고 넘어가고 싶어요. 주인공 마일스는 전편보다 한층 성장해 등장합니다. 영화는 마일스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찾아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일스는 미구엘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죽을 것이며 이 공식설정을 거스른다면,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듣지 않고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선택을 내리죠. 이는 전편에서 악역 킹핀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차원이동기를 만들다 다중세계를 멸망시킬 뻔한 악행이나, 미구엘이 다른 세계의 가족과 생활하며 행복을 찾으려다 해당 세계를 멸망시킨 행위와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따라서 관객은 마일스가 아버지를 구하려 하는 행동과 감정에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마일스가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심하고 마일스의 선택이 옳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일스는 두 명의 인물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존재합니다. 먼저 그는 자기 세계의 인물을 구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고요. 두번째는 분명한 본인의 철학을 가지고 사익이 아닌 사람을 구하기 위한 공익을 목표로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피터B파커나 미구엘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수시로 마일스를 소년이라고 부르며 그를 막으려 하는데요. 마일스는 그럴때마다 유독 날이 선 행동을 보입니다. 마일스와 같은 상황을 경험한 스파이더맨들임에도 아이라는 이유로 마일스의 철학을 무시하고 폄하하며 틀렸다고 말하는 이들의 모습은 마일스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전혀 모르는데도 마일스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며 마일스가 차가운 세상을 마주해 실망하더라도 가족이 뒤에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는 마일스 어머니의 말과 대조됩니다. 결국 부모님의 말과 전편에서의 그웬과 피터와의 관계를 통해 성장한 마일스는 미구엘이 마일스가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으며 변칙자일뿐이라는 일갈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자아와 신념을 가지게 되죠.
이번 영화에서는 마일스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한 그웬의 서사도 인상깊어요. 그웬은 마일스와 닮은 인물이기도 해요. 전편의 마일스의 아버지가 애런 삼촌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그랬듯이 그웬의 아버지는 스파이더그웬을 피터를 죽인 살인자로 생각하고요. 스파이더그웬이 스스로의 얼굴을 드러냈음에도 그웬을 체포하려합니다. 마일스처럼 부모님께 스스로가 스파이더맨라는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해요. 후반부에는 아예 각자의 차원으로 추방된 둘의 모습을 동일한 연출의 교차편집으로 보여주기도 하죠.
파스텔톤의 우아하고 따뜻한 색감으로 장식된 그웬의 세계처럼 그웬은 이번작 가장 고뇌하고 감정적으로 시달리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그웬은 작중 자신의 아버지와 마일스에게 동일하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어라는 대사를 합니다. 그웬이 피터의 죽음 이후 얼마나 상처받았는지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자신을 감추고 조심하게 되었는지 드러내는 대사입니다. 그웬은 친구도 가족도 자신의 일부만 알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웬의 생각과는 반대로 아버지는 오히려 경찰 서장을 그만두면서까지 그웬과 함께 하려 했습니다. 마일스도 피터B파커와 그웬에게 상처 받았을 뿐 변칙자라는 사실에는 흔들리지 않았죠. 결국 아버지가 서장 자리를 그만두자 공식설정도 변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녀는 마일스를 구하러 떠납니다. 이 장면에서 전작부터 친구를 만들지 않는다던 그웬이 친구들을 모았다며 너도 들어올래라고 화면 속 관객에게 말하는 엔딩은 새삼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피터B파커는 그웬과 달리 이번에는 분량이 훨 줄어서 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딸 메이데이와 함께 분량은 충분히 챙겨갔고, 공식설정을 파괴했을 때의 여파를 본 탓인지 마일스와는 대립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에서 메이데이를 보며 아내 메리 제인과 대화를 나누며 생각이 바뀌었음이 암시되죠. 메이데이 또한 마일스의 선택으로 나타난 변칙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데다 아내에게 당신이나 당신의 딸같은 스파이더맨을 위한 지침서는 따를 필요 없다는 말에 공식설정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흔들립니다. 그럼에도 다음 장면에서는 자녀에게 듣는 법 가르치기라는 책을 읽으며 졸고있다 깨는 장면이 깨알 웃음포인트죠.
스파이더펑크로 등장해 체제와 일관성을 무시하는 독특한 캐릭터성과 남성적인 매력, 코크시 방언으로 많은 팬을 양성한 호비 브라운이나 인도풍 스파이더맨으로 등장한 파비트르, 그웬의 멘토로 오토바이 액션을 선보인 제시카 드루도 누구 하나 뒤떨어지지 않고 매력적이었습니다. 마일스와 대립하는 미구엘도 엄격하지만 자상한 리더로서의 면모와 공식 설정으로 가족을 잃은 아픔, 분노를 가진 독특한 반동인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다 했죠.
검은 반점을 활용해 포탈을 여는 스팟은 개그캐릭터이자 광기로 가득찬 악역을 맡았습니다. 초반에 ATM기를 터는 코믹한 장면과 후반부 포탈을 흡수해 검은색으로 색이 반전 되어 기괴하게 몸이 뒤틀리며 떠오르는 모습은 너무나 분위기가 달라 오히려 그의 카리스마를 더 부각시켰습니다.
여담으로, 1편에서 애런 삼촌과 마일스가 그래피티를 그리는데요. 이때 기대는 말길/기대하지 않았었는데라고 중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no expectation이라는 문구에 스팟의 실루엣처럼 보이는 그래피티가 겹쳐있습니다. 2편에서는 그웬과 피터B파커, 아빠, 엄마 등의 그래피티가 추가되었는데요. 그러니 이들을 마치 스팟이 집어삼키는 듯한 모양새가 됩니다. 좋은 복선이죠. 스팟은 현실에서도 삼류악당으로 기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해당 작품에서 메인빌런으로 부상했으니 문구 또한 스팟에 걸맞습니다. 스팟을 마일스가 탄생시켰고 마일스를 스팟이 탄생시킨 숙적이라는 점도 매력적입니다.
인상깊은 장면과 오마주도 많습니다. 마일스를 잡으라고 미구엘이 외치자 수많은 스파이더맨이 삿대질을 하는 장면. 직후 엄청난 수의 서로 다른 스파이더맨들이 마일스를 쫒는 장면. 그웬과 데이트하던 마일스가 함께 건물 아래에 거꾸로 앉는 로맨틱한 장면도 인상깊었어요. 특히 그웬이 다른 세상의 그웬들은 모두 스파이더맨과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을 하자 마일스가 그웬의 손을 향해 손을 가까이 하는데요. 그웬이 모두가 다 잘되지 않았다며 쓴웃음을 짓자 마일스가 손을 조심히 뒤로 빼는 장면이 기억이 나네요. 그러고는 마일스와 그웬을 중심으로 노을이 지는 도시가 상하반전되죠. 이 장면의 색감과 구도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이때 나오는 Monalisa라는 음악도 상당히 어울렸네요.
스팟이 알케맥스 폐허에서 마일스가 싸우는 장면에서 마일스가 아버지를 구하는 장면은 전편에서 스파이더맨이 마일스를 구하는 장면과 유사합니다. 이 장면에서 스팟의 구멍을 향해 뛰어내리려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전편의 마일스를 연상시킵니다. 한편 영화의 초반부 벌쳐가 부순 핼리콥터의 추락을 막는 장면에서 한 사람이 뱅크시 작품이네라고 농담을 하는 장면은 전편을 떠오르게 합니다. 뱅크시는 거리미술로 유명한 체제에 반대하는 인물인데요. 마일스가 거리미술을 하며 이 영화는 그동안의 스파이더맨 영화에 등장했던 클리셰들을 공식설정으로 정하고 이를 파괴하는 서사가 줄거리의 요지인만큼 꽤 의미심장하기도 합니다. 다른 세상의 프라울러가 된 마일스와 애런 삼촌이 마일스를 샌드백에 매달아 둔 장면은 전편에서 마일스가 피터B파커를 샌드백에 매단 장면을 떠오르게 하죠.
반대로 무거운 영화의 주제와는 달리 가볍게 볼 수 있는 개그장면이나 재치있는 대사도 여전했어요. 엄마와 아빠가 마일스의 충격적인 스페인어 성적에 혀를 내두르는 장면. 그웬이 신원을 밝히지 않으려는 미구엘을 흑화가필드라고 놀려먹는 장면. 마일스의 아빠가 마일스에게 외출 금지를 내리고 엄마에게 잘했냐며 확인 받는 장면은 웃음을 짓게 했습니다. 참고로 맨 처음 언급한 장면은 지금 제 이탈리아어 성적이 더 충격적임을 깨달은 이후로는 씁쓸한 장면이 되어버리고 말았군요.
그리고 여러 인물의 서사나 장면들이 짜임새있게 연결되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스테이시 서장이 our girl이 나타날지 모르니 주의집중하라는 경찰 무전을 듣는데요. our girl은 요주의 인물인 스파이더그웬을 말하지만 영미권에서는 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스파이더그웬의 정체가 본인의 딸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대사이죠. 또한 그웬과 피터B파커가 마일스를 구하러 가기로 하는 장면에서 각각의 조언자 스테이시 서장과 메리 제인은 둘다 지침서를 언급합니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결말과 전개는 상당히 인상깊었어요. 아빠를 구하는 데 실패하고 다른 차원에 떨어져 프라울러가 된 자신을 마주하는 마일스. 단순한 악역과는 달리 서로 반대되는 철학으로 대립해 부딫히는 주인공과 반동인물. 선의로 한 마일스의 행동이 죄다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는 점까지 단순한 권선징악과는 거리가 먼 전개와 결말은 좋았습니다. 스파이더맨의 클리셰를 공식설정으로 명명해 영화의 핵심 줄거리로 활용하는 영리함도 마음에 들었고요. 운명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 이야기의 주제도 너무 좋았습니다. 유일한 단점은 영화가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죠.
독특한 연출과 그림체, 색감은 한층 발전했어요. 연한 파스텔 톤의 감성적인 색감으로 이루어진 그웬의 세상. 인도 화풍으로 그려진 파비트르의 세상. 신문지를 오려붙인 조악한 느낌의 호비뿐만 아니라 스파이더맨 실사 영화와의 조합. 레고 스파이더맨까지 다양한 화풍들이 여러가지로 오감을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마일스와 그웬 두 매력적인 주연의 달달한 로맨스도 부담스럽지않게 극에 섞어들었어요. 그럼에도 전편에 걸쳐 가족애는 공통적인 주제로 뿌리깊게 자리 매김하여 일관성을 유지해 주었구요. 마일스와 부모님의 따듯하면서 애정어린 관계. 그웬과 스테이시 서장의 갈등과 화해. 가족을 잃고 스스로의 과오를 연상시키는 마일스의 모습에 피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미구엘. 메이데이를 낳고 육아를 하는 피터B파커 등 주조연 모두 가족과 관련된 일들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묘사된 점이 이를 방증합니다.
독특한 연출, 색감과 그림체. 애니메이션답지 않은 무거운 주제와 철학. 매력적인 주조연과 악역. 충격적인 결말과 완벽한 각본까지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스파이더버스 시리즈의 두번째 영화.
호아킨 도스 산토스와 켐프 파워스, 저스틴 K 톰슨 감독의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였습니다.
평점 5/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