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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거장의, 생에 대한 질문을 담아낸 작별인사

by 도연호

저는 요새 영화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아시아 영화 탐색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강의인데요. 실상은 영화를 하나 보고 감상평을 주욱 돌아가면서 말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강의입니다. 감상평이 끝나면 교수님께서 영화에 대해 설명을 해주세요. 확실히 영화 교수님은 좀 다르시긴 하다라는 생각이 좀 들었었습니다. 저는 남의 이야기 듣기는 좋아하지만 내 이야기를 말로 하기는 좋아하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재밌더라구요. 역시 영화는 혼자 보는 게 좋지만 영화 이야기는 여럿이서 할수록 더 풍성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9월에 토의해본 영화였습니다. 워낙 해석이 다양하고 난해한 영화인만큼 다양한 의견을 통해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왜 이런 난해한 형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떠나보냈는지 써보려 합니다.




그들은


아마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그는 군수물품 공장의 이사였던 아버지에게 키워졌고, 도쿄 공습을 피해 시골로 피난을 갑니다. 마치 주인공 마히토처럼요. 마히토는 여러면에서 다른 지브리 주인공들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어린 아이답지 않게 조숙하고 새어머니의 담배를 훔쳐 일꾼들에게 건네주며 거래하는 모습이나 돌로 스스로의 머리를 깨는 모습을 보면 일반적인 주인공이라고는 전혀 볼수가 없습니다. 이는 마히토가 전쟁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참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선한 인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어머니가 있죠. 새어머니는 마히토에게 상냥하고 다정히 대합니다. 마히토는 이런 새어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만 말하지요. 그런데 탑의 이공간에서 새어머니는 출산을 앞두고 자신을 구하러 온 마히토에게 개연성 밥 말아먹은 느닷없는 폭언을 퍼붓습니다. 그런데 사실 새어머니가 등장하는 첫 장면을 살펴보면 이는 이질적이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어린 양아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아이가 언니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레 임신 사실을 밝히며 손을 붙잡아 자신의 배에 가져다대는 행동은 새어머니도 마히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는 암시입니다.


히미는 이공간의 수호자입니다. 그녀는 큰아버지를 도와 이공간의 펠리컨들이 태어날 생명들을 잡아먹지 못하게 보호합니다. 충격적이게도 그녀는 마히토의 어머니인데요. 그녀는 결말부 병원의 화재로 본인이 죽게 될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마히토를 낳기 위해 돌아갑니다. 스스로의 죽음을 아들의 탄생과 결부시켜 이해함으로서 히미 또한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이공간


그럼 탑의 이공간은 무엇일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공간은 마히토의 환상과 큰할아버지의 환상이 겹쳐져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마히토는 도쿄에서 시골로 내려올 때 수많은 동화책들을 싸들고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 책들 사이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마히토는 발견하죠. 그리고 이공간은 이공간이라기에는 어딘가 정형적이고 익숙한 부분이 있습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들을 연상시키는 할머니들. 도로시를 연상시키는 히미. 탑의 구멍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습니다. 왜가리는 토끼이죠. 왜가리는 토끼처럼 현실과 이공간을 연결합니다. 이 왜가리는 현실에서나 이공간에서나 방관자로 기능합니다. 마히토가 들어서는 탑은 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물로 된 어머니가 녹아내리자 어린 왕자처럼 장미가 깨어지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공간은 어린 아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현실적이고 잔혹하며 비유적인 설정들로 가득합니다. 이는 이미 노인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린 아이였던 자신의 상상을 변형시키고 발전시킨 것입니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 무한한 전쟁을 벌이는 펠리컨들. 식인을 즐기는 나치 앵무새들과 앵무새 대왕. 심지어 친구인 왜가리조차 초반부에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까 이공간의 절대자인 큰할아버지는 지브리 작품들의 절대자인, 늙은 미야자키 하야오라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공간은 지브리 스튜디오 그 자체로도 해석될 수 있죠. 후계자에게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을 물려주려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실패하고 결국 시대가 변화하며 사라져 버리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만화 작업방식 말입니다. 교수님 설명으로는 애당초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졌던 <바람이 분다>는 원래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작만 맡으려 했답니다. 그러나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출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결말 해석: 돌의 붕괴와 나무의 재생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후세대들에게 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큰할아버지의 제안과 마히토의 거절은 영화의 핵심입니다. 큰할아버지는 잔혹한 질서와 전쟁, 제국주의로 가득찬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돌탑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마히토는 절대자가 되기를 거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는 단 한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돌을 질서를 핑계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수단으로 해석해볼까요. 그렇다면 그러한 제국주의 앵무새의 야욕으로 돌탑이 무너지고 이공간이 붕괴하는, 말하자면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말까지도 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돌은 무력을 통한 해결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소년 마히토는 영화의 초반부에 전쟁이라는 참상에 대항해 무력을 사용하려 합니다. 아버지처럼요. 손수 활을 만들어 왜가리에 대항하고 시비가 붙은 친구들에게도 주먹을 날립니다. 종내에는 돌로 스스로의 머리를 찍어버리고 말죠. 풀에 피가 튑니다.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돌에는 악의가 있다. 돌은 나무가 아니다. 말하자면 마히토는 이공간에서 펠리컨과의 대화를 통해 폭력의 악순환을. 제국주의 앵무새들을 통해 권력의 무용함을. 새어머니와 와라와라, 히미를 통해 삶과 죽음의 선순환을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완전한 세계의 구축 대신 불완전한 세계로의 회귀와 전진을 선택하게 됩니다. 무력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냐?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 붕괴를 받아들이고 재생해야 합니다. 나무처럼요. 그래서 오프닝에서 병원의 붕괴와 엔딩에서 탑의 붕괴는 수미상관을 이루지만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집니다. 오프닝의 공습은 파괴를 위한 붕괴라면 탑의 붕괴는 재생을 위한 붕괴이죠. 수많은 펠리컨과 앵무새가 활기찬 모습으로 탑에서 뛰어나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석하면 뜬금없이 마무리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이해됩니다. 환상의 여행을 끝마친 마히토는 책을 가방에 쌉니다. 마지막으로 세계대전의 참상과 폭력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돌을 꺼내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마히토가 떠난 빈 방이 비추어집니다. 이야기는 끝이 나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관


마지막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과 그의 마지막 작품인 이 영화를 결부시켜 해석해 보겠습니다. 먼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물들은 입체적인 면모를 보입니다. 영화 유튜브 댓글을 보다가 보니 여러 사람들이 마히토의 아버지가 부정적인가 긍정적인가를 놓고 싸우고 있는 장면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가부장적이지만 책임감있는 남편. 무기를 생산하는 사람이면서도 가족은 안전히 보호하는 이중성도 지닌 인물이죠. 그런데 위에서 설명했지만 마히토와 새어머니, 심지어 히미까지도 마냥 선한 인물은 아닙니다. 히미가 펠리컨과 싸우며 와라와라를 불태우는 장면은 히미가 절대선으로 그려졌다면 묘사할 필요 없는 장면이겠죠. <붉은 돼지>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대체현실은 자주 등장합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이공간이죠. 반전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모노케 히메>, <천고의 성 라퓨타> 그리고 위에 언급된 두 영화에서 감독은 전쟁을 비판해왔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또다른 특징은 자연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는 자연을 순수한 객체로만 보지 않고 무자비하며 불가항력적인 재앙을 불러오는 절대적인 존재로도 보았습니다. 문명과 자연. 그리고 삶과 죽음의 아레고리는 그의 작품들에서 자주 나타났죠. 결국 이 작품에서도 돌과 나무의 형태로. 히미의 죽음과 마히토의 탄생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행도 있습니다. 그는 비행 또한 전쟁을 위한 수단이자 자유를 향한 갈망이라는 두가지 상반된 주제로 해석해 왔습니다.




정답?


제가 그럴듯하게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위의 해석이 정답은 아닙니다. 영화는 난해하고 완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개연성이 무너져 있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서 우리에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 고찰하고 알아가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죠. 이렇게 마무리 지으니까 갑자기 원점으로 회귀한 느낌이기는 하네요. 왜인지 마히토와 왜가리가 이야기하던 거짓말쟁이의 역설이 떠오르는군요. 그래도 근거를 하나 들자면, 마히토가 처음 이공간에 도착했을 때, 황금문에 나를 알게 되면 죽는다라고 적혀있잖아요. 여기서 나,는 제가 느끼기에는 생일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생이 무엇인지 영원히 탐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생이 무엇인지는 죽고 난 후에나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 우리는 그저 몸부림치며 살아갈 뿐인 것이 아닐까요.


지브리의 거장이 마지막으로 내놓은 난해한 걸작이자 그의 생에 대한 고찰을 집대성한 자전적인 애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평점 5/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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