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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어쩔수가없다>

순환하는 생태계, 인간을 잡아먹는 인간

by 도연호

일주일도 더 된 영화인데 추석이 다가와서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기대에는 못 미치는 작품이기도 했고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어서 쓸까말까 하다가 그래도 쓰고 싶은 장면들이 있어서 결국에는 밀어넣게 되었어요. <얼굴>을 쓸까 조금은 고민했었습니다만 결론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했고요. 박찬욱 감독은 정말 영화를 만드는 테크닉이 제 부족한 눈으로 보아도 대단한 것 같아요. 상상력도 그렇고 그걸 영화적인 문법으로 구현하는 능력이 다른 어떤 감독과 비교해도 독보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영화에 담아내는 비유적인 의미와 상징들도 대단하구요. 그런데 저는 그러한 테크닉들이 약간 영화의 주제와 따로 노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도 그런 헐거운 장면들이 많잖아요. 그리고 그는 그러한 독특한 연출을 자신의 일부로 체화해서 개인적으로는 거부감도 없어요. 저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반대로 철저히 계산되고 짜여진 영화를 추구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따로 노는 장면이 나오니 이상스럽게 거부감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극한의 미장센과 연출


일단 영화의 미장센과 연출은 놀라웠습니다. <올드보이>나 <헤어질 결심>도 극한까지 몰아붙인 미장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쩔수가없다>가 저는 더 좋았어요. 특히 저번 주에는 제가 <오발탄>을 다루었는데요. 이 영화는 <오발탄>을 직접적으로 오마주하고 있습니다. 마치 <기생충>이 <하녀>를 오마주했듯이요. 권총과 치통의 활용이 그랬습니다. 다만 <오발탄>에서는 주인공이 끝내 총을 발사하지 못하고 앓던 이를 뽑아버리며 양심을 지키고는 파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어쩔수가없다>는 반대로 총을 발사하며 양심을 잃어버리고 주인공은 마지막에 살인을 완성합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유만수가 최선출의 강요에 못이겨 그동안의 금주를 어기고 술을 마시는 장면인데요.


저는 이 장면의 연출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만수는 조금씩 살인에 물들어가며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인간성을 잃어버리게 되는데요. 구범모와 고시조를 살해할 때에는 권총을 사용해야만 했던 그가 선출을 살해할 때는 총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손에 피를 묻히잖아요. 그런데 이 장면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상징적인 권총 살해를 한번 더 합니다. 바로 인간성의 자결인데요. 만수가 술잔을 기울일 때 술잔에 든 하나 뿐인 얼음이 만수의 이마를 향해 내려갑니다. 총알처럼요. 이는 카메라를 술잔의 아래에서 비추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 뜬금없이 만수 집의 그네가 조용히 흔들거립니다. 권총의 공이치기처럼요. 그리고 술을 들이킨 만수는 앓던 이를 마취도 하지 않고 시원하게 뽑아버립니다. 양심을 잃어버린 만수를 이보다 더 창의적인 연출로 묘사하는 감독은 박찬욱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집의 수직적인 구조나 벽지 활용도 놀라웠구요. 더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들 시원과 대화할 때 카메라가 두 사람의 짐승같은 그림자를 비추는 모습. 동물을 연상시키는 고시조의 사체. 다이아몬드의 창을 통해 땅에 아이폰을 묻는 만수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리와 시원. 그리고 고시조를 죽이고 곡선의 도로와 휘몰아치는 바다가 인간의 식도와 토사물처럼 비치는 미장센도 기억에 남습니다. 고추잠자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만수와 범모, 아라의 대화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코믹한 장면. 아라의 연극적인 장면들도 기억에 남네요.




결말 해석


그렇다면 결국 유만수는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요.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요? 앞서 유만수가 인간성을 잃어버리는 부분은 설명했었구요. 또다른 관점으로 보자면 그는 생태계에서 스스로 자생하는 식물인간이 아닌 인간을 잡아먹는 동물로 전락해버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온실에서 살인을 행하고 고시조를 닭처럼 묶어 어린 사과나무의 비료로 줍니다. 마치 그가 살인을 통해 자녀들, 시원, 리원에게 새로운 미래를 선물해 주었던 것처럼요. 그가 나무를 잘라 종이를 만들어 종이로 된 돈을 받고 다시 나무로 된 첼로로 곡을 연주하는 리원의 순환 관계가 그렇습니다. 혹자는 뱀과 장어, 사과나무의 등장이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하던데 이 해석도 맞습니다. 아예 작은 나무 아래에 앉아 거대한 만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는 시원의 얼굴이 비치는 상상력 넘치는 장면도 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성경의 차용이나 생태계를 이용한 비유들이 산업화되버린 한국 사회에서 전문직에 목매다는 한 인간이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부품으로 전락해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이 비유 자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의문이 들정도로 참신하기는 하지만요. 아이고, 그리고 좀 뜬금없이 밝히기는 했지만 '저는' 부터 '생각했어요' 까지가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주제 의식입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만수는 취업에 성공하고 아무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공장에서 홀로 소리없이 승리의 고함을 지르는 장면에 주목했어요. 만수는 인간성이 퇴화하여 공장의 부품으로 되돌아갑니다. 만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쩔수가없다>도 함께 퇴화합니다. <어쩔수가없다>는 초반부 현대극을 표방합니다. 극이 마무리되었을 때 아라는 연극적인 투로 사건의 진상을 지어내고 원형의 조명이 비칩니다. 그리고 만수의 취업과 함께 끝내 극은 무성영화로 전환됩니다. 저는 <모던 타임즈>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마침 찰리 채플린이 연주할 줄 알았던 악기들 가운데는 첼로가 있습니다. 그는 첼로 사랑이 대단해 아예 첼로 앨범을 내기도 했었죠.




개연성


한편 영화가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기도 하던데, 저는 이 비판에 한해서는 조금 반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판의 요지는 상류층으로 보이는 만수가 취업을 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감정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건데요. 그런데 소위 개연성은 평가하기에 애매한 감이 있습니다. 저는 영화의 서사가 가지는 설득력을 개연성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예를 들어 회사의 CEO가 불법으로 무기를 판매하고 발명가인 주인공을 팔아넘긴다고 철로 된 깡통 로봇을 만들어 반격하는 서사를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아이언맨>을 볼 때는 아무도 개연성 문제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원스>라는 존 카니의 음악 영화에서는 남편과 아이가 있는 여성이 주인공과 아무런 대사나 서사없이 갑자기 키스합니다. 하지만 그 장면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사의 설득력이라고 하는 것은 각본이나 대사가 아닌 <아이언맨>의 연출이나 미장센, 그리고 심지어는 <원스>처럼 음악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해당 의문과 비판에 연출과 연기, 대사, 미장센을 통해 충분한 해답을 내놓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감독의 테크닉과 한국의 취업문제, 인간성의 상실에 대한 탐구와 여러 은유적 모티프들을 결합한 영화.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입니다.




평점 3/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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