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녀의 수레바퀴에 깔리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도 절기가 바뀌면 어김없이 따뜻한 봄바람이 분다. 봄이네, 싶으면 바로 더운 여름으로 접어든다. 날씨 탓을 하며 좀처럼 집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운동에 소홀했던 나도 동네 헬스장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헬스장에는 ‘몸짱형’ 청년들도 많지만, 나처럼 ‘생존형’ 운동파도 많아 보인다. 헉헉거리며 트레드밀을 밀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기구를 움직이지만, 정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운동이다.
담당 트레이너의 잔소리를 피해서 구석에서 살살 운동하고 있으면, 어느 틈에 트레이너가 옆에 와 있다.
“근육 1kg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면 1,500만 원입니다. 노년에 아파서 눕기라도 하면 손실되는 근육이 돈으로는 얼마인 줄 아세요? 운동하세요! 운동해야 돈 법니다!”
그렇다. 이제 나는 노년의 근 손실을 걱정해야 하는 50세 아줌마다.
20대까지는 시간의 흐름도, 나이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결혼 후 자녀들을 양육하느라 정신없던 30대부터 누가 내 나이를 물으면 한참 더듬어 생각해야 했다. 40대를 맞으며, 나도 이제 중년이네, 하며 시무룩했다가, 앞자리가 5로 바뀌던 올해부터 정말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이로군,라는 생각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타협하는 나이다.
하지만, 실상은, 한가롭게 내가 50세가 되었다는 둥 나이 타령할 수도 없게 현실의 삶이 너무나 바쁘고 고달프다. 대학생 자녀와 고등학생 자녀가 있고, 거동이 불편하고 중증의 알츠하이머, 즉 치매를 앓고 계시는 시어머니와, 온몸이 종합병원인 친정어머니가 있다. 맞벌이로서, 내 가정을 돌보고, 시가와 친가를 챙겨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운동은 멋진 몸매를 위해서라기보다, 살기 위한 절박함으로 하는 것이다.
나는 50세로서(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꼭 50세의 대표를 자처한 것 같지만) 앞장서서 할 말이 많다.
30, 40대를 자녀 양육으로 힘들게 보내고 이제 사회로 내보낼 막바지 결정적인 상황에서, 시어머니의 낙상 사고로 알게 된 치매 진단은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린 듯한 기분이었다. 친정어머니의 오랜 지병들(물론 한두 개가 아니다.)은 친정어머니가 40대 후반일 때부터 시작되었고, 80대 중반을 넘긴 지금까지 쭉 관리를 해왔다. 지금까지는 친정어머니 한 분의 간병을 직간접적으로 도왔다면, 앞으로는 두 어른의 간병과 돌봄이 동시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은 멀게는 일제 강점기의 끄트머리, 가깝게는 6・25 전쟁 직후를 겪은 다사다난했던 세대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효의 관념으로 보면, 우리가 성년이 된 후, 부모님의 노후를 부양하며, 잘 모시는 게 당연하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렇게 그들의 부모님을 모셨고, 자신들이 그렇게 모셔 왔듯, 우리의 효에 기대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논란거리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부모들은 백세시대를 사는 첫 번째 세대이자, 자신들조차 한 번도 백 세까지 장수하는 부모를 모셔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옛날에도 백 세를 누린 분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지금보다는 훨씬 단명한 게 사실이다. ‘환갑’이란 말이 왜 나왔겠는가. ‘육십갑자’의 ‘갑’으로 돌아오는 나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60세는 다시 사는 보너스 인생과도 같은 의미가 있었다. 나의 머리로는 부모의 장수를 축복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슴 저 깊은 곳에서는 ‘어, 이거 불공정 거래의 느낌이 드네, 이 억울한 감정은 뭐지?’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우리의 생존 고리를 다음 세대의 효심에 기대는 일종의 저축성 보험으로 비유해 보자. 부모 세대는 부모의 부모 세대가 단명함으로써 자신들이 보험금을 납입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납입한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다. 우리는 열심히 보험금을 납입했는데, 우리의 자녀 세대로부터 만기환급금을 기대할 수 없다. 자녀 세대는 심지어 보험금을 잘 내지도 않는다. 나는 보험금을 매달 냈지만, 만기환급금을 떼일 것이 분명하다. 내가 희생하는 것을 전제로 운영되는 파산 직전의 보험계약이다.
지금과 같은 장수 시대가 당황스러운 건, 우리의 부모가 오래 살아 부양이 힘들다는 불효 섞인 투정이 아니다. ‘노인’이 ‘더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이 세태는 누구도 먼저 가보지 않은 길이므로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내가 낸 보험금이 공중분해 될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