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죽음'에 대하여

<말테의 수기>를 읽고

by 책식주희

지금은 559개의 병상에서 임종을 맞는다. 물론 공장 생산 방식이다. 그처럼 엄청난 생산 과정에서 개개의 죽음은 그다지 잘 대접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죽는다. 오늘날 누가 공들여 치르는 죽음을 위해 돈을 쓴단 말인가. (중략) 조금 더 있으면 자기만의 죽음은 자기만의 삶만큼이나 드물게 될 것이다. 맙소사, 모든 것이 이미 다 마련되어 있다. 사람이 세상에 나오면 다 짜여진 하나의 삶을 찾아 기성복처럼 그것을 걸치기만 하면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안문영 옮김(2013), '말테의 수기'(열린책들), ebook 6%]



말테는 '레디메이드 죽음'에 대하여 말한다. 기성복처럼 준비되어 있는 죽음의 과정. 몇 번의 장례식 경험으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병원, 장례식장, 빈소, 화장터, 장지로 이어지는 한국의 장례 문화. 하지만 그러한 '레디메이드 죽음'도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순 없다. 가족이 없거나 자식이 없거나 돈이 없으면 모두에게 '같아 보이는' 죽음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덴마크 귀족 출신인 말테는 미처 보지 못했거나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만, 그가 본 파리의 기성복 같은 죽음조차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상주는 조문객만 맞으면 되는 게 아니다. 지하로 갈수록 저렴해지는 빈소부터, 상복, 수의, 관, 유골함, 하다못해 조문객용 국과 반찬 종류까지 끊임없이 가격과 종류를 선택해야 한다. 가족을 잃은 슬픔보다 돈 걱정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면 평소 상조회에 잘 납입해두거나 돈을 따로 마련해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레디메이드 죽음'의 과정이다.


그럼 돈만 있으면 되느냐. 그것도 아니다. 옆 빈소 앞까지 가득 채우는 근조화환이나 다른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의 시끌벅적함은 모른 척 한다해도 장례를 진행할 가족이 없으면 장례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상주는 남자만 할 수 있다며 딸 말고 남편이나 사촌을 불러다가 앉히는 케케묵은 악습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치더라도, 당장 가족이 아니면 시신을 인도받지도 못하는 것이다. 가까운 가족 순으로 연락이 가는데 그들이 모두 시신 인계를 거부하면 구청 등 지자체에서 무연고자 장례를 진행해준다고 한다. 사실혼 관계나 친구는 전혀 상관할 수 없는 가족'만'의 절차로 선을 긋는다. 결혼이나 장례 등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만) 모이는 친척들을 보며 새삼스럽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데, 반대로 가족이 없으면 그런 일들을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결혼하지 않고, 자식이 없고, 형제 없고, 왕래하는 친척조차 없으면 장례식 자체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작년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한가할 적에 했던 생각들이다. 문득 동생 녀석이 소중해졌다. 내 장례는 나 죽고나서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부모님 돌아가시는 길에 혼자가 아닐 것이라는 사실에는 위로가 된다. 어느새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는 게 슬퍼지기도 한다.


누구를 위한 장례식인가. 제사나 장례식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죽은 당사자보다는 남은 이들의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위해 하는 것 같다.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이기도 하고, 살아계실 적에 잘 못 해드렸던 일들을 만회하는 기회로 삼기도 하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족'만'의 것으로 묶어 놓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법적 가족'으로 묶어놓은 장례절차는 누군가에게 분명 상처가 될 것이다. '레디메이드 죽음'조차 쉽게 허락받지 못하는 세상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쯤해서 내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다. 죽음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사후세계나 윤회, 귀신이나 영혼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입장에서 어차피 내가 끝났는데 그 이후를 고민해서 무엇하랴 하는 생각이 크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갑자기 약해지는 게 싫고 고통스러운 게 두렵다. 병원에서 억지로 이어 붙여야 살 수 있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순간들이 찾아올까 무섭다. 내가 죽음을 너무 단편적으로 보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내가 두려워하는 그 모든 것이 '죽음'일까. 그렇다면 살아가는 거 자체가 '죽음'이 아닌가. 늙어가고 약해지면서 죽어가는 과정이 삶이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이 흘러가다 보면, 순간순간 더 가치 있는 삶을 살고자 의욕을 불태워야 한다. 소포클레스의 말처럼 '오늘 하루는 어제 죽은 누군가가 간절히 그리던 내일'이라고 의욕 잔뜩 끌어모아 불태우는 나와 어차피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니 적당히 하루하루 즐기며 대충 살자고 나태하게 중얼거리는 내가 있다. 어느 게 옳은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분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 그럴 뜻이 없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안문영 옮김(2013), '말테의 수기'(열린책들), ebook 84%]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