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랑'을 믿는가
똘스또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사랑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이고 신뢰할 수 없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 또한 맞는 말이다. 그것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흔히 말하는 ‘사랑’은 남녀간의 성적인 결합을 의미하여 불타오르듯 강렬했으나 길게 유지되지 않고, ‘님’이었다가 ‘남’이 되는 것이 순식간이니 믿기가 더욱 어려운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것은 소극적이고 좁은 의미의 사랑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랑은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배려, 존중, 공감 어쩌면 동정이나 연민. 누구든 마음 한편에 작게나마 갖고 있을 것 같은, 의지하고 싶고 의지가 되고 싶은 공동체의식, 선의, 그냥 생명으로써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감사함. 그 모든 것들을 나는 ‘사랑’이라고 이해했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따라서 신앙을 거의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한다.’(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계산적이고 냉소적인 나는 의심도 많고 겁도 많은 편이라 실망하기 싫어서 기대하지 않는 것을 택하고 실패하기 싫어서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잘 파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전에 있어서는 고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런 내가 ‘사랑’을 믿는다고 하면 뭔가 앞뒤가 제대로 맞지 않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사랑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톨스토이가 천사의 입을 빌려 말했고, 에리히 프롬은 ‘신앙’의 문제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을 인식하고 믿기로 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딱히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건은 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스님 복장을 한 외국인을 만난 적이 있었다. 고행하는 승려가 이렇게 생겼을까 싶을 만큼 꾀죄죄한 승려복을 입은 작고 마른 노인이었는데 내 앞을 가로막을 때까지 나는 내 갈 길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노인은 내 앞에 서서 경계하는 내게 유창하지 않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던 영어발음으로 자신이 한국으로 공부하러 온 사람이고, 지금 굉장히 외롭다고 말했다. 나는 돈을 달라고 할 줄 알고 집까지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근데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난다. 한 번도 본적 없는 타인, 그것도 외국인이 길을 막고 악수를 청한 상황, 나는 방금 전까지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감정의 반전이 이상하고 기이했다. 내 손은 찼고 노인의 손은 생각보다 억셌고 악수는 예상보다 오래 이어져 다시 불안감이 치솟을 때쯤 노인이 고맙다며 손을 놨다. 나는 그저 끄덕이고 집까지 달렸던 것 같다. 여전히 이상한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냥 낯선 타인의 감정에 눈물이 핑 돌만큼 공감했고, 선뜻 손을 내밀었다가 그게 오래 가자 불안해졌다가 손을 놓자 안도했던 기억. 이제는 그 기억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공감’, 그리고 ‘사랑’이라고. 그때 이후로 다른 이들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여전히 내 머리 한편으로는 노인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고, 도움을 청하는 방식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내가 느낀 노인의 외로움, 그리고 악수에 대한 감사는 거짓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뉴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온갖 범죄와 사건, 사고들, 안 좋은 소식들을 참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보다 작고 사소하게 우리들 곁에서 선의와 배려와 존중들, 사랑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지 않겠는가. 복지단체를 후원하고, 채식을 하고, 불의한 일에 함께 화를 내고, 연대하고 응원하고 싶은 그런 마음들. 나는 그 근간에 타인에 대한 선의와 사람에 대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이 모두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의 사고에 마음이 아프고,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사람이란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고 유전자의 화학작용으로 우연처럼 만들어졌다고 믿는 것과는 별개로, 또는 그와 동시에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믿는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기심으로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들은 사랑으로만 살아갑니다.” (례프 똘스또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