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라는 제목으로 더 익숙한 이 소설은 간통한 여성이 가슴이 간통(Adultery) 의 첫 글자 A를 가슴에 새기고 속죄하는 내용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 소설을 읽는다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상대 남자를 밝히지 않고 그의 명예를 지켜주고자 했던 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애틋한 마음이나 자진하여 속죄를 선택하여 살아가기로 결심한 굳건함. 스스로 나서지 못하고 죄책감을 끌어안고서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목사 딤스데일의 괴로움, 그리고 비뚤어진 복수심으로 스스로 타락해가는 칠링워스까지. 그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선택을 하고 죄를 짓고 살아간다. 그들과 같은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어떤 죄를 짓고 또 어떻게 속죄를 할까 생각해보게 된다.
어릴 적 나는 종종 ‘거짓말’을 하는 아이였다. 학원 숙제가 하기 싫어서 학원을 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 날엔 집에 일이 있다고 학원에 전화를 하고 학원 갈 시간에 집을 나와서 학원 끝날 시간에 맞춰 귀가했다. 딱히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랐다. 공부 잘하고 왔니? 라는 질문에 그냥 끄덕이면 그 이상 묻지도 않았다. 적당히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 노릇을 잘 해둔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어떤 애랑 싸우고 한 대씩 주고받아 얼굴에 멍이 든 적이 있었는데 혼나는 거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선생님은 전혀 몰랐고 엄마는 며칠 뒤에나 멍을 발견했다. ‘모르겠는데 넘어졌을 때 생겼나?’ 하는 말에 더 묻지 않았다. 먼저 말할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딱히 어른이 끼어들 상황은 아니었고 불필요한 걱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내 거짓말이 죄였을까. 그렇다면 그것의 속죄는 ‘섭섭함’과 ‘체념’이었나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진 않았으니 섭섭했고,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내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떤 ‘규칙’만 잘 지키면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살든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고 크게 티내지만 않으면 된다는 교훈(?)을 얻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이들도 적당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온 우주가 거짓이어서, 만져도 모르고 손으로 쥐면 오그라들어 없어지고 마는 법이다. (너대니얼 호손, <주홍 글자>, 열린책들, 47%)
<주홍 글자> 속 딤스데일의 이중적인 행동, 겉으로는 신실한 목사인 듯 남에게 설교하면서 속으로는 죄책감으로 자학하며 괴로워하는 가증스러운 모습이 불쾌할 만큼 싫은 것은 자기혐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도 자기 입으로 말할 용기는 없고, 자신의 명예나 위치를 잃고 싶지도 않은 딤스데일의 모습이 혐오스럽지만 그의 논리구조가 이해가 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이해하는 것 같은 거랄까. 헤스터가 그 동네에 살지 않았다면, 헤스터와 펄이 그렇게 자주 눈에 띄지 않았다면 딤스데일의 죄책감도 그리 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펄이 헤스터에게 ‘살아있는 주홍 글자’였다면, 딤스데일에게는 헤스터가 살아있는 그의 ‘주홍 글자’였을 것이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오, 헤스터. 가슴에 주홍 글자를 버젓이 내놓고 다니니 말이오! 내 가슴은 남모르게 타고 있소!”(같은 책, 63%)
헤스터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속죄의 과정, A의 뜻을 간통에서 천사로 바꿔나가는 모습이 나는 고귀하고 놀랍다고 생각하면서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는데 그건 내가 머리로만 이해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숨길 수 있는 것을 숨기지 않고, 피할 수 있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들이받는 모습은 미련해보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무언가로 느껴져 경이롭다.
이제는 그런 종류의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안다. 다들 나처럼 적당히 위선적으로 때로는 위악적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는 주홍 글자를 가슴에 올리고 누군가는 보이지 않게 품고 살아간다. 모두가 헤스터처럼 살 수는 없다. 당당히 속죄할 수 없는 자는, 죄도 짓지 말자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