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파주 모티프원

금수저가 아닌 '글'수저 집안이 운영하는 인생학교

by 이수

발렌타인 다음날인 주말, 남편과 함께 파주로 북스테이를 다녀왔다. 헤이리마을 아랫쪽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노란문의 모티프원. 사실 모티프원은 워낙 유명하고 인기가 많아, 주말에 예약을 원하는 경우 예약일이 열리는 날 바로 접속해서 티켓팅을 해야 한다. 작년 11월에 다음 3개월 예약이 열리는 날을 적어두었다가, 오픈됨과 동시에 재빨리 2월의 주말을 예약해두었다.


한창 춥고 눈이 오다, 북스테이를 가는 날 마침 날씨가 꽤나 풀렸다.

집과 멀지 않아서 여유있게 출발했고,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모티프원의 소박하면서도 귀여운 노란색 문 앞에 섰다. 안내받은 비밀번호를 누르고 숙소로 입장하자마자 처음 느껴진 것은 '따뜻하다!' 였다.

실제로 사진상으로 보면 차가워 보이는 타일 바닥이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온돌 시스템으로 아주 따땃-하게 데워져 있었기 때문.


그리고 보이는 공용 거실 겸 주방에서는 은은하게 클래식FM이 흘러 나오고 있었고, 주황빛의 조명이 나무 책상과 책장을 비춰주고 있었다. 우와-하며 잠깐 구경은 하는 사이 호스트님이 연극에서 짜기라도 한 듯 다른 방에서 나와 반갑게 인사해주시고, 안내를 해주셨다. 책이 많은 공간이라 따로 분류는 해두지 않았지만, 한강 작가의 책 만은 특별히 한 쪽 공간에 코너를 마련해두셨다고 한 것도 참 좋았다.


우리가 선택한 방은 제일 인기가 많은 편인 <화이트 룸>. 직장 동료가 작년에 먼저 다녀온 후 너무 좋았다는 후기를 알려줘서, 기대하며 방에 들어선다. 소담한 방에 한 쪽 벽면은 내추럴한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 책상 위에 밑은 모두 책으로 채워져 있다. 두 면이 통창으로 은은한 햇빛이 들어오고. 겨울이라 앙상한 가지의 나무가 아쉬웠지만, 또 그 나름대로 운치 있기도 했다.


공용 거실의 분위기에 홀딱 반해버린 나는 짐을 풀고 바로 책 한권을 골라 나무 책상앞에 자리 잡았다. 공용 거실 옆 베란다, 테라스 공간에 길냥이들을 위해 물과 사료를 둔 그릇이 보였는데, 귀여운 치즈냥이와 검정 턱시도를 입은 냥이가 일상이라는 듯, 스르륵 다가와 사료 한 번, 물 한 번, 슥슥 그루밍 한번. 나는 책 한 페이지, 냥이 훔쳐보기 한 번. 졸려서 낮잠을 자겠다던 남편도 어느새 방에서 나와 각자 자리를 잡고 고요 속에 독서시간을 가졌다.


저녁을 먹고 마을도 구경하다 들어오니 어느 새 밤이 되어 한층 더 아늑해진 숙소. 최근 강아지와의 삶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알아보고 있기에, 우리는 강아지 관련 서적이 있는지 한참 뒤적거리며, 웃긴 제목이나 신기한 책들은 서로 공유하기도 하며. 뜨듯한 바닥이 있는 공용 공간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내 눈에 모티프원의 주인장, 이안수 작가님이 쓰 <아내의 시간> 책이 들어왔다. 이안수 작가는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하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헤이리마을에 모티프원을 만들었다. 그러다 아내의 은퇴 이후 두 부부는 세계를 떠돌며 여행을 하고 있고, 현재는 그들의 첫째 딸인 나리씨가 호스트로 숙소를 운영하고 있다.


숙소를 만든 사람이 작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책상에 놓인 책이 궁금해졌다.


"아빠는 우리 어릴 때부터 글쓰기의 중요성을 엄청나게 많이 얘기하셨다. 여행을 자주 데리고 다니거나 보냈는데 항상 여행기를 쓰라는 조건이 붙었다. 대학생 때 유럽 여행을 갈 때 지원을 청했더니 여행기 원고를 써오라고 하셨다. 서포트 해주는 여행 경비는 그 원고료로 지불하는 거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난다. 아빠는 늘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셨던 것 같다. 인생의 경험과 단상이 휘발되는 걸 경계하신 것 같다." <이나리 님 인터뷰 중>


첫째 딸은 배우, 둘째 딸은 유엔개발계획에 들어가 아프리카 등지에서 근무했고, 막내 아들은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예술가 적인 기질을 가진, 그리고 글쓰기의 중요성을 함께 길러준 '글수저' 집안의 분위기가 너무 멋져보이고 부러웠다.


"여기 오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다이아몬드다. 잘 들여다보고 배워라"

이안수 작가님이 숙소 호스트를 하는 나리님에게 했다는 이 문장은 북스테이, 즉 책을 매개로 하는 이 공간을 꿰뚫는 말 같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읽히지 않는 책과 같고, 그들이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조용한 헤이리마을에 묵으며 서로 연결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니까.


언젠가 내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이 곳을 조금이나마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숙소를 나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 춘천 썸원스페이지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