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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잘싸

by 이수

졌지만 잘 싸웠다. 연초부터 준비하던 시험이 10월 말에 끝난 뒤, 마음속에 품고 있는 문장이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둥그렇고 삐죽삐죽한 둥지 같은 말. 깨끗이 인정하자면 자리합리화 혹은 정신승리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약 10개월 동안 퇴근 후 4시간 이상을 다시 책상에 앉아 보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히나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어떤 특정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없는 일이라 더 그랬을지도. 시험날이 한 두 달 앞으로 다가왔을 때부터는 불안감이 엄습해 와,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귀가하는 매일을 반복하였다. 책가방을 메고 땡땡부은 다리로 집으로 가는 길, 한숨을 까만 하늘에 내뿜으며 이걸 왜 시작한 건지 스스로 많이도 원망했다. 새벽에 잠 덜 깬 눈으로 달려와 반겨주는 나의 강아지가 있어 근근이 버텼다.


가을의 햇살이 완연했던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래된 중학교에서 다소 작게 느껴지는 책걸상에 앉아 아침 9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시험을 치렀다. 어르신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연령대는 예상보다 다양했고, 각자 필기가 빼곡한 교재나 자료를 들고 마지막 쉬는 시간까지 고군분투했다.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빠르게 가채점을 해보았는데, 1차, 2차 시험 모두 딱 1문제씩 모자라다. 택시 아저씨의 험한 운전 때문인지 실망감 때문인지 심하게 멀미가 났다. 뒷좌석 의자는 가만히 있고 앞 좌석은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왜곡이 느껴진다. 현실이 믿기 싫어서였을까.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안 된 것 같아"라고 털어놓으며 사춘기 중학생처럼 서럽게 울었더랬다.


*


시험 준비를 하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렇다고 평소에 뭐 그렇게 청교도적인 삶을 사는 것도 아니지만. 일단 10월 말에 시험을 접수해두었고, 인강도 등록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다. 학원에서 시키는 대로 인강을 밀리지 않게 듣고, 편법 없이 정석 커리큘럼 대로 따랐지만, 시간이 부족했고 암기력도 부족했나 보다.


또한 무탈한 일상의 소중함을 여실히 느꼈다. 역시 고통이 있어야 편안함의 소중함을 아는 법. 시험이 끝나고 나자, 퇴근 후에 이렇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니 새삼스럽다. 게다가 누워 있을 수 있다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 한 구석에 죄책감이 들지 않다니? 밥을 빠르게 먹고 시무룩하게 '다녀올게...' 하며 독서실로 향하지 않아도 되는 저녁의 소중함이란.


친구들과의 약속도 미루고, 추석 연휴 땐 수험생 뒷바라지 한다고 양가 부모님들이 집으로 반찬을 싸들고 왔다. 좋아하는 글쓰기 모임도 2달이나 못 나갔다. 힘들다고 유난 떨고 어리광도 많이 부렸다. 그래도 시간 낭비 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련다. 속상해하는 수험생을 달래려 파워 T인 남편이 말보따리에서 여러 단어를 찾는다. 이 시험 떨어진다고 아-무 문제도 안 생겨,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야. 이제 놀 수 있잖아! 등등. 그중 가장 위로가 되었던 말은,

내가 봤어. 엄청 열심히 하는 거. 내가 다 알아. 였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새벽까지 했다는 것, 그래.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나에게 단순히 성취감을 느끼기 위한 도전이 누군가에게는 생계가 달린 일일 수 있다. 또 다른 수많은 분야에서 다음 단계를 위한 인고의 번데기 시기를 보내는 모든 이들, 독서실 옆자리 꿈쩍도 않고 나보다 늦게 공부하던 성실한 여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겸허해진다. 순수한 노력을 발톱 때만큼이라도 흉내 내보면서 나에게도 무언가 쌓이지 않았을까. 그게 합격증이 아닐지라도.


일상을 관찰하는 여유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야 여유 없던 내 시야에 노랑, 주황으로 물드는 계절의 변화가 들어온다. 삶에 여유가 없으니 일상의 소소한 부분을 보며 음미하고 경탄할 시간도 사치로 느껴졌다. 돌아보니 시험 전의 나는 꽤나 사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공부하는 동안 메모장에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메모해 두었다. 참 간사하게도 시험이 끝나고 나니 그 메모장을 적을 때만큼의 새로운 열정이 불쑥 솟아나지는 않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다시 이번 가을을 충만한 것들로 채워야겠다. 지루했던 일상이 사실은 꽤나 풍요로웠던 것이라는 걸 곱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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