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 Jan 30. 2024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기억상점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유년 시절은 도시라고도 시골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소도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자랐다. 단칸방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엄마 아빠의 자수성가 과정을 몸소 겪었다고 해야 할까.


어느 해는 작은 마당이 있는 구옥 주택에 살았다. 재롱이라는 점박이 똥개를 키우고 돌멩이로 분꽃을 빻으며 소꿉놀이를 했다. 거실엔 주전자를 올릴 수 있는 원통형의 기름 난로가 있었는데, 호기심 많은 7살이었던 나는 어느 날 무언가에 홀린 듯이 난로 위에 손가락 3개를 턱-하고 올렸다. 몇 초 뒤 울며불며 엄마 품에 붙잡혔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겨울 수돗물에 쬐깐한 손가락 3개는 마비되었다. 손가락에 개구리 왕눈이처럼 붕대를 칭칭 감은 덕분에(?) 다음날은 유치원엘 가지 않고 TV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7살의 나이에 전화위복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맛보다니.


이 씨 가문에 전설처럼 회자되며 내려오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괜스레 웃음이 난다. 손을 데었던 둥그런 난로를 떠올리면 주변의 집안 구조가 그려진다. 알라딘에 나올 것만 같은 문양을 가진 두꺼운 카펫, 현관 옆 계단 위에 있었던 재롱이의 빨간 지붕집, 여름이면 작은 튜브형 수영장을 만들어 물놀이를 했던 현관 난간. 찬란할 것이라곤 하나 없는 평범한 장면에, 괜히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필름 카메라 필터가 끼워져 아련해진다.


9살의 가을날엔 가족끼리 주왕산 국립공원에 단풍을 보러 갔다. 등산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작은 연못의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으앙 울음을 터뜨렸고 아빠가 재빠른 순발력으로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쑥 꺼내줬지만, 허리 밑으로는 다 젖어버린 불운의 어린이가 되었다.


바람은 차갑고 햇볕은 따사로웠던 가을날. 오빠의 내복을 빌려 입고, 바지와 양말과 신발을 너른 바위 위에 올려 오징어처럼 말려두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단풍처럼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아유~딸내미가 물에 빠졌나 보네~" 하며 놀리며 지나가던 것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아직도 가족모임에선 주왕산 입수 사건 또한 (난로 사건과 함께) 종종 언급되곤 한다.


뜻대로 된 것보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기억들이 내 안에 더 강렬하게 남는 법이다. 그 난로에 손을 데지 않았다면 시골동네 구옥의 구조를 이렇게나 자세히 기억했을까. 아무 일 없이 계획대로 주왕산 정상에 올라갔다 왔으면 가을 가족여행의 해상도가 이 정도로 선명할까. 문득 떠올린 나의 어린 시절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손가락을 다치고, 물에 빠지고, 엄마한테 혼구녕이 났지만 이제는 떠올리면 웃음이 나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으니 괜찮다고.


뭐 하나 내 맘대로 안 되는 것 투성이인 어른의 삶이지만, 물에 빠져도 바지를 말리며 금방 깔깔 웃을 수 있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이것쯤은 재밌는 에피소드지'의 마인드로 사소한 불행들을 소화해 내며, 내 안을 더 단단하고 너그럽게 다져보기로 한다.

작가의 이전글 2024년의 '도파민X' 프로젝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