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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 Jan 16. 2024

글을 쓰는 이유

글쓰기라는 선물

요즘 누군가를 만나면 이름과 나이 외에도 꼭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혹시 MBTI가 뭐예요?"


그중 나에게 가장 극단성을 띠는 것은 J 성향, 즉 계획성이다. 나는 계획하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회사 업무를 할 때도 체크리스트를 잔뜩 적어두고 완료되면 줄을 쫙 그어 없애는 것에 굉장한 희열을 느끼는 편이다.여행 계획은 오전, 오후로 나누어 구체적인 스케줄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두고 플랜 B까지는 만들어놔야 속이 시원하다. 친구들과의 주말 약속도 식당을 정하지 않고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평일은 그저 대기하는 시간으로 여기며, 계획된 주말과 휴가라는 깃발을 멀리 세워두고 작은 점만 바라보며 살았다. 분명 많은 것을 한 날임에도 애꿎은 평일을 '오늘은 쓰레기 요일', '아무것도 안 했다'라며 마구 폄하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와 집을 반복하는 평일은 나에게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일상이 주는 소소한 행복의 힘

한 달에 4번 있는 주말에 뭘 했는지만 기억하고, 작년에 해외여행 갔던 일주일만 기억이 나고. 그러다 보면 시간은 4배속보다 더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나의 월 화 수 목 금은 손끝을 빠져나가는 모래 같았다. 일상을 제대로 보내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 찾은 돌파구는 바로 일기 쓰기였다. 일상을 기록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 만난 문장이 있었다.


[물론 '쓸 만한 것이 없다'라고 여겼던 날도 있었습니다. 출근과 퇴근으로만 이뤄진 하루를 보냈을 때 그랬죠. 하지만 그런 날 밤에도 일기장 앞에 앉으면 말을 고르게 되었어요. 내가 보낸, 심지어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를 두고, 오늘은 정말 별 볼일 없는 하루였다, 아무 날도 아니었다, 그렇게 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럼 오늘 내가 걸은 걸음과 내가 한 말들과 내가 본 풍경은 뭐가 되는 걸까요. 시간을 어째서 그리도 쉽게 지워버리고 마는 걸까요.

...점심때 뭘 먹었지? 누구 말에 웃었더라? 재생이 끝난 하루를 가만히 '다시 보기' 하는 마음으로요. 그건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였어'에서 '오늘은 이런 기억할 만한 일이 있었네'로 넘어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매일 밤 일기장을 펴고 하루를 ‘다시 보기’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에 잠깐 멈추고 '어, 이거 좋다' 하며 순간을 음미하게 되었고, 그런 날은 일기장에 쓸 말이 많아졌다. 다시 보기를 반복할수록 저화질이던 평일의 해상도가 높아졌다. 단조로운 평일에 얕은 리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일상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미약한 노력들도 하게 되었다. 홀대했던 평일을 조금 더 정성스레 매만졌다. 미뤄뒀던 아침 운동도 시작하고, 지하철에서 짬을 내 독서도 하고.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여겨졌던 날은 일기장을 덮은 후 책 한 장이라도 슬그머니 보게 되었으니까.


그러면서 나를 무조건 행복하게 만드는 치트키도 알게 되었다. 책 한 권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스탠드를 딸깍 키는 순간, 달리기 후 토마토가 된 얼굴을 찬물로 식혀낼 때,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건강한 집밥을 해먹고 동네를 산책하는 일요일 밤. 그러니까 이 치트키들은 너무 거창하거나 멀리 있으면 안 된다. 손꼽아 기다리던 콘서트나 1년 전부터 예매해둔 해외여행도 좋지만 바로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집어먹을 수 있는 소확행 비스킷을 마련해두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가 즐거워지는 순간을 좀 더 자주 반복하세요. 그것이 일상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우리는 깨닫게 되겠죠.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똑같지, 뭐" 하며 입을 다물던 내가, 이전보다 쉽게 행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요.]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김신지


글쓰기를 통해 열린 새로운 일상의 장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기 쓰기를 시작한 작년 여름. 우연히 동네 도서관에서 글쓰기 수업 공고를 봤다. 일상을 기록하는 것에 꽂혀있었는데 에세이 써보기 수업이라니. 내가 딱 찾던 거다! 하며 살짝 떨리는 손으로 신청 버튼을 클릭했다.


총 10명이 참여하는 수업이었고 20~40대로 연령이 다양했다. 첫 시간에 좋아하는 책과 글쓰기를 하고 싶은 이유를 말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최근에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초등학생 같은 일기 쓰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라고 했던 것 같다. 각자의 이야기를 수줍지만 또렷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왠지 좋은 글동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직감했다.


경험해 보니 함께 쓰는 것의 핵심은 공감이다.

‘나만 이런 생각 하는 거 아니었구나. 나도 그럴 때 있는데!’

매주 서로 쓴 글을 소리 내서 읽고 합평하는 시간은 한 줄 한 줄 공감의 향연이었다. 내 글에 100% 공감했다는 말을 들을 때는 역시 혼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에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평소에 하던 생각을 멋진 글로 표현해 낸 분의 글을 읽을 때면 가려운 곳을 긁는 쾌감까지 느껴졌다.


다양한 연령대가 분포되어 있다 보니, 서로 현재 가진 고민은 각자 다르고 바라보는 시선도 물론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스스로를 발견하고 확장하고 싶은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 그들이 살면서 ‘멈칫하는 순간’ 이 무엇인지를 읽을 땐 어쩐지 모두가 비슷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좀 더 나은 나를 발견하고 싶고, 사소한 일상에서 따스함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 그런 글동무들과 풍요로운 여름을 보냈다.  인연이 이어져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글도 기고하게 되었고.


작년만 해도 올해 내가 매주 글을 쓰며,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리고 있을 줄은 단 1퍼센트도 예상하지 못했다. 기사에 엄마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싣고, 그 이야기를 엄마의 친구가 알아봐 연락이 오는 신기하고 재밌는 해프닝도 있었다. 알아주는 J인 내가 인생이 주는 뜻밖의 샛길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글쓰기는 삶의 지속적 흐름에서 절단면을 만들어 그 생의 장면을 글감으로 채택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많은 절단면을 만들어 엮어두고,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의 속도를 늦추며 한 발 한 발 찬찬히 걸어갈 테다.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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