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장 한복판에서, 잠시 글이라는 숨을 쉬다

쉼 없이 살아낸 인생의 쉼표.

by 정 영 일

[삶의 전장 한복판에서, 잠시 글이라는 숨을 쉬다]

― 쉼 없이 살아낸 인생의 쉼표..


이른 새벽, John Williams의 ‘Schindler’s List’ 바이올린 선율이 조용히 흐른다.

애절하고, 슬픔이 휘몰아치는 그 음색 속에서 문득 지난 시간을 되짚게 된다.


지난 87일간의 짧은 쉼.

그리고 이제는 다시, 거칠고 바쁜 현실로 나아가야 하는 시간.

남은 20여 일의 여유마저 가슴 한편을 저릿하게 만든다.

그 시간을 보내며, 이 마음을 어딘가에 조용히 담아두고 싶어

이렇게 글을 남긴다.


나는 은퇴 후에도 쉬지 못했다.

어쩌면 진짜 인생은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직장이라는 이름 아래 견디며 살아왔지만,

그 모든 시간이 끝났을 무렵.나는 다시 ‘살아야만 한다’는 이유로

주유소라는 새로운 전장에 발을 들였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일터였을 그곳.

하지만 나에게는 생계를 위한 전투장이었고,

육체적·정신적으로 버거운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곳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차량과 사람들,

거칠고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나는 점점 말라갔다.

그러나 그 피로는

단지 그곳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주식이라는 세계 안에서 살아왔다.

사람들은 주식을 흔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 말하지만,

내게 그것은 하루하루를 긴장과 불안 속에서 보내야 하는

고독한 싸움의 장이었다.


수익과 손실, 예측과 실패, 쉴 틈 없는 분석과 결정 속에서

나는 늘 스스로를 몰아세웠고,

삶은 어느새 균형을 잃었다.

주식은 나를 지치게 했고,

그러나 또다시 거기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정신은 피로했고, 마음은 마모되었으며,

그 어떤 곳에서도

나는 치유받지 못하고 있었다.


삶은 늘 녹록지 않았다.

직장도, 주식도, 그리고 은퇴 후의 삶도

어느 하나 쉬운 구간은 없었다.


그리고 최근,

무엇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체력의 급격한 저하다.


당뇨 합병증으로 시야는 흐려지고,

잇몸과 치아는 망가지고,

몸 전체가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제는 예전처럼 버티는 것조차 두렵다.

그동안 너무도 무심하게 지나쳤던 ‘몸’이라는 존재가 하루가 다르게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마음은 아직 살아 있으나,

육체는 하루하루가 경고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시간들이 결국 이렇게 되돌아오는구나 싶다.

그런 자책과 회한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멈추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나에게

뜻밖의 쉼이 찾아왔다.

예정되지 않은 87일의 공백. 그 시간은 처음엔 불안했지만,

서서히 나를 치유하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나는 조용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의 언저리를 따라 단어를 꺼내 놓고,

한 줄 한 줄 삶을 붙잡듯 적어 내려갔다.

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삶의 무게를 내려놓는 작은 행위였고,

마음의 고요를 회복하는 호흡이었다.


처음엔 생각을 정리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글이 내 일상이 되었고

잠시나마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이 평온도

영원할 수는 없다.

쉼은 유한하며,

현실은 다시 내게 문을 두드린다.


다시 거친 전장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주유소의 노동, 주식 리딩의 고뇌,

그리고 점점 쇠약해져 가는 몸과 마음.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역할도 아닌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잠시나마 내 숨이 되어주고,

또 하루를 버틸 작은 힘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버티는 삶 속에서도,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작가의 말)

글을 쓰는 이 시간이,

제게는 숨을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삶에 지쳐 있는 누군가에게,

그 숨결이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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