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과 탁배기 한 사발

by 정 영 일

[후배들과 탁배기 한 사발]

오랜만에

대학교 써클 후배 둘과

탁배기 한 사발을 마셨다.


잔을 기울이며

스치듯 떠오른 기억들이 있었지만

술은 이상하리만치 취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 한쪽이

조용히 데워지는 자리였다.


삼십오 년 전,

대학교 축제가 한창이던 시절

막걸리 한 사발을 던지듯 나누던 후배들이다.

테니스 코트 위에서

울고 웃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던

스무 살의 시간을

몇 해 동안 함께 보냈다.


그때 우리는

늘 젊었고

오늘 하루만으로도 충분했다.


미래는 멀었고

지금은 언제나 현재였다.


세월은 흘러

우리는 중년을 지나

이순을 함께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한 후배는

한국기원에서 삼십 년을 근무한 뒤

퇴직 후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

지금은 작은 사무실의 사장이 되었다.

여전히 밝고 긍정적인 얼굴이

그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또 한 후배는

대형 설계 건축사무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퇴직 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이제는 제법 묵직한 삶과 자산을

스스로 일구어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서

그만의 철학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몇십 년을 보지 못했어도

탁배기 한 사발 앞에서는

시간이 금세 접혔다.


각자의 길,

각자의 고비,

각자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들이

조용히 오갔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버텨낸 사람만이 지닌

단단함이 있었다.

나는 그 이야기들 사이에서

끝내 말로 다 하지 못한

시간의 무게를 보았다.


밤이 깊어질 즈음

비는 더 추륵추륵 내렸다.

우리는 말없이

2차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첫 아파트에 투자하던 날의 기억,

삼십 년이 넘는 직장 생활의 무게,

자산을 불려오며

묵묵히 견뎌야 했던 시간들.


서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지난날의 장면들이

잔 사이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나 또한

후배들의 이야기 속에서

내 지나온 시간을 함께 떠올렸다.


이야기들은

조심스럽게 피었다가

조용히 지고

다시 피어났다.


한 학번 아래의 후배들.

긴 시간 속에서

자기 몫의 인고를 견뎌낸 그들이

문득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 마음을 건네자

웃음이 번졌고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시간은

우리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날의 술은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지나온 시간을

서로의 잔에 조금씩 따르며

천천히 음미하는 자리였다.


탁배기 한 사발.

그 안에는

젊은 날의 숨결과

지금의 무게,

그리고

끝내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쩌면 인생은

이렇게

지나간 시간을 한 모금씩 떠올리며

오늘을 견뎌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날 밤,

나는 술보다 오래 남는

사람의 온기를 마셨다.


이 인연이

또 다른 계절의 탁배기 한 사발로

다시 이어지기를

조용히 바라보며

이 글을 남긴다.


- 우풍 정영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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