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어느 날, 강화도 국화저수지 새벽 산책

by 정 영 일

[10월 어느 날, 강화도 국화저수지 새벽 산책]

10월의 어느 날,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기 전

매일처럼 반복되던 새벽이 또다시 찾아왔다.


어둠과 빛이 아직 서로를 완전히 허락하지 않은 그 틈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강화도행 첫차에 몸을 맡겼다.


감미로운 팝송이 귓가를 스치고,

멜로디와 멜로디 사이의 공백 속으로

내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창밖에는 밤새 내린 비가 남긴 안개가

산등선을 흐릿하게 지우고,

그 몽환적인 풍경 속에서

현실과 기억의 경계는 서서히 풀어진다.


마치 저 풍경이

내 안쪽 어딘가를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지나간 시간의 기억들이 물처럼 스며들고,

아팠던 마음,

끝내 말로 꺼내지 못했던 상처들,

오래 눌러 두었던 이야기들이

안개처럼 천천히 떠오른다.


그 모든 것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마주하고 싶어

나는 자주 찾는 강화도 국화저수지를 향해 걷는다.


저수지는

나를 반기지도, 밀어내지도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고요히 있다.


나는 그 둘레를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물결은 의미 없는 파동으로

내 생각을 흩트린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저수지와 나 사이에

분명한 간극이 있음을 느낀다.


닿을 수 없지만

서로를 비추는 거리.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 길 위에서는

세상의 소음이 희미해지고,


나는 현실의 내가 아니라

생각하는 나,

기억하는 나,

조용히 숨 쉬는 나로 존재한다.


혼자인데도 외롭지 않은 시간.

저수지와 나 사이에 흐르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거리감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잠시 걸음을 멈춘다.


잔잔하던 수면 위로

바람이 스친다.

물결이 흔들리고,

그 미세한 출렁임에

내 마음도 함께 떤다.


단지 물 위의 파동일 뿐인데,

마치 오래전의 어떤 장면들이

되돌아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웃음과 눈물,

이별과 시작,

상처와 기쁨,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수많은 말 없는 순간들.


저수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을 비춘다.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무언가를 더 얻는 일이 아니라,

버티며 통과한 시간 끝에서

조용히 남는 감각일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석가모니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왕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 위에

자신을 오래 머물게 했던 시간.

극단의 고행보다 더 깊었던 것은

그가 끝내 도망치지 않고

자기 삶의 질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던 그 침묵이 아니었을까.


그가 남긴 말들보다

그가 견뎌낸 고요한 시간들이

지금의 나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네는 듯하다.


그 생각에

이유 없이 눈가가 뜨거워진다.


지금 나는

저수지 앞 벤치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물과 나 사이의 이 거리,

가까운 듯 멀고

멀지만 분명 이어져 있는 이 감각이

이상하게도 나를 살게 한다.


예전의 나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이 느림.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이 시간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다.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완성되지 않은 나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때로는 멈추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


그 멈춤 속에서

우리는 저수지처럼

말없이 스스로를 비춘다.


그리고 그 순간,

삶은 가장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 우풍 정영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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