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 배우의 얼굴에 남다]
어느 날, 한 장면의 영상을 바라보다가
한 배우의 눈물이 마음 한켠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대사보다 먼저 전해지는 그 눈물은
연기가 아니라 기억이었고,
연출이 아니라 시간의 무게였다.
1992년 영화 〈보디가드〉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케빈 코스트너와 휘트니 휴스턴.
한 시대를 함께 건너온 두 사람의 얼굴이
사진처럼 멈춰 선 채 마음속에 남아 있다.
비록 그 장면 속 여배우는
이미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머물고 있지만,
그 시절을 회상하는 남자 배우의 눈가에
주룩주룩 흘러내리던 눈물은
이별의 슬픔이라기보다는
함께 웃고 숨 쉬었던 시간들에 대한
애틋한 인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남자 배우의 전성기 시절을 기억한다.
활기 넘치던 얼굴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던 그때,
그의 영화는 특별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덧
일흔에 가까워진 지금의 얼굴을 마주하니
세월 앞에는 그 누구도 장사가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실이
조용히 마음에 내려앉는다.
배우의 삶은 참 묘하다.
누구보다 많은 얼굴을 남기지만,
정작 자신의 시간은
작품 사이 어딘가에 흘려보낸다.
카메라 앞에서는 수많은 인생을 살고,
카메라가 꺼지면
자신의 늙음과 외로움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최근 문득 떠오른 안성기 배우 역시 그러하다.
긴 시간 한국 영화의 얼굴로 살아온 그는
화려함보다는 묵묵함으로,
성공보다는 품격으로 기억되는 배우다.
주변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베풂이 일상이었다는 후일담을 들을 때마다
그의 연기가 왜 그렇게 따뜻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재산을 쌓아두기보다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그의 선택은
배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깊이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스크린 속 영웅보다
삶 속에서 조용히 선한 선택을 해온 사람이
오래 기억된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지금도 가끔은
박중훈과 호흡을 맞추던
〈투캅스〉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경쾌하고 유쾌했던 그 시절의 영화는
지금 생각하면
우리 모두가 조금 더 가벼웠던
시간의 초상처럼 느껴진다.
참,
사는 것도 쉽지 않지만
시간이 이렇게 소리 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은
유독 아쉽게 다가온다.
붙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이
그저 지나가 버리는 것.
그래서 더 애틋하다.
배우의 삶은
일반인의 삶보다 더 빠르게
세월과 마주하는지도 모른다.
작품만 남긴 채
자신의 시간은 뒤로 미뤄두고
어느 날 문득
주름진 얼굴로 관객 앞에 다시 선다.
그래서 나는 이제
‘늙어간다’는 말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싶다.
늙어간다는 것은
마모되는 것이 아니라
익어간다는 것이라고.
덜 날카로워지고,
조금 더 너그러워지며,
시간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그 배우의 눈물은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젊음을 잃은 슬픔이 아니라
충분히 살아낸 시간에 대한
조용한 인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은 늘 그렇게
말없이 흐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각자의 얼굴로
각자의 삶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 우풍 정영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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