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쿰하면서도 시원한 묵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작업실은 곧 초등학교 과학실의 형태로 변한다.
초등학교 3학년, 그곳에서 처음 먹을 갈았다. 조그만 아이에게는 무식하게 큰 벼루였다. 먹과 벼루를 만지는 손가락은 아궁이에 들어갔다 온 고양이 마냥 검댕이 번졌다. 먹을 싸고 있는 종이를 손톱으로 조심스럽게 까서 까만 벼루 위 작은 물웅덩이에서 굴렸다. 물은 조금씩 먹빛으로 번진다. 초등학교 3학년, 유난히 또래보다 몸집이 작은 아이에게 먹을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밤하늘처럼 검정 물이 벼루를 덮었지만, 그 물은 붓끝에서 화선지로 연하고 빠르고 또 크게 퍼져갔다. 선과 선들은 뽕잎을 잘 먹은 누에처럼 통통했으며 서로 뒤엉켜 시작과 끝점을 헤아리기에 어려웠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다른 아이들의 벼루를 봤다. 다른 아이들은 무식하게 크고 사악하게 아이의 손을 더럽히는 돌벼루가 아닌 가볍고 손에 검정이 묻어나지 않은 플라스틱 벼루에 먹을 갈 필요 없이 검정 용기에서 먹물을 죽 짰다. 먹물이란 것은 밤하늘이 아닌 빛 한 가닥 없는 공허한 우주 같았고 외롭고 차가운 심해 같았다. 순수하고 완벽한 색이었다. 아이는 곧 먹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검정이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플라스틱 벼루와 먹물이 탐났다. 아이의 부모는 벼루와 먹은 할아버지께서 쓰시던 것이며 플라스틱보다 훨씬 좋은 것이라 했다. 먹물은 먹을 갈아 물에 탄 것이라 했다. 부모는 아이에게 새로운 벼루와 먹물의 불필요성에 관해 설명했지만 아이는 집의 가난을 설명받았다. 더 이상 벼루와 먹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이는 먹빛으로 바란 체육복 상자에 문방사우를 챙겨 과학실로 향한다. 가장 먼저 도착한 아이는 먹을 갈기 시작한다. 먹이 조금씩 물을 타고 번져가는 동안 과학실은 시끌벅적해진다. 서예를 하면 차분해질 것이라는 부모들의 바람만 지나치게 반영된 이곳은 주의력결핍 아이들로 가득 차 차분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가방을 내던지고 자신들의 문방사우를 꺼내어 벼루에 먹물을 찍 짜낸다. 먹을 갈던 아이는 아직 다른 아이들의 먹물 빛처럼 까만색을 만들지 못했다. 먹을 가는 시간이 한 참 지체되자 담당 교사는 아이 벼루에 먹물을 몇 방울 떨어뜨린다. 순흑빛이 밤하늘에 퍼져나간다. 블랙홀처럼 주변의 어둠을 더 강한 어둠으로 집어삼킨다. 어둠은 붓끝을 타고 화선지에 진하고 깔끔한 선을 남긴다. 아이는 화선지 위 선을 가만가만 들여다본다. 도무지 아이가 먹을 갈아서 낼 수 없는 선명함과 날렵함이다. 아이는 검정 먹물에 먹을 담그고 다시 갈기 시작한다. 마치 본인이 먹을 갈아 완벽한 검정을 만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