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사의 일기①

나를 살게 하는 것

by Leeyoon

얼마 전
3일간의 지독한 일정이 있었다.

포항에서 다섯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다음 날은 시흥에서 두 시간
그리고 다시 그다음 날을 위해 포항으로 내려가는 길

중간에 시흥 교육이 없었다면
포항에서 하루 쉬며 숨을 골랐을 텐데
삶은 때로 이렇게 예상치 못한 강행군으로
사람을 몰아넣곤 한다.
연일 이어진 장거리 운전과 긴 강의는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가끔 이런 일정은
평소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만나게 해준다.
몸은 분명히 힘든데
주어진 일들을 하나씩 해내고 나면
설명하기 어려운 에너지가 쌓인다.
단순히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한 뼘쯤 넓혔다는
기분 좋은 ‘레벨업’의 감각에 가깝다.

시흥에서 강의를 마치고
다음 날 교육을 위해 포항의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그날의 첫 끼였다.
중간에 마신 커피 한 잔과
휴게소에서 집어 들었던 작은 주전부리 몇 개가 전부였던 빈속으로
룸서비스 봉골레 파스타를 시켰다.

배가 너무 고팠던 탓일까
아니면 하루의 무게가 소스에 배어든 탓일까.
허겁지겁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으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먹어본 파스타 중에
'가장 맛있었다고'
누군가의 수고가
나의 허기를 이토록 따뜻하게 채워주었다는 사실이 고마워 메모지에 짧은 감사 인사를 적어
그릇 위에 올려두고

곧바로 욕조에 물을 받았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
나의 모든 피로가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안락함 속에서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집에서
커다란 솥에 물을 끓여
나를 씻겨주던 엄마의 모습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가난이지만
내 마음과 몸이 그 온도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일할 수 있다는 것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따뜻하게 씻을 수 있다는 것
요즘처럼 풍족한 세상에서는
굳이 감사할 이유로 떠올리기 어려운 것들이지만,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그 당연한 것들이 선명해졌다.

샤워를 마치고
다음 날 진행할 교육 내용을 한 번 더 점검한 뒤
일찍 자려고 침대에 누워
‘30분만 읽고 자야지’ 하며 읽고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 순간이
이상하게도 너무 행복하고 설레어서
이 감정을 어디라도 기록해두고 싶어졌다.
매일 책만 읽고 쉬기만 하면
과연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그날 밤은
일했기 때문에 쉼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아내도, 엄마도 아닌
그냥 ‘나’로서만 존재하던
아주 충만한 순간이었다.


3일간의 일정은
나를 소진시킨 것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자리로
나를 조용히 데려다 놓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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