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벌의 탄생
1월이다.
거울 속의 나는 아직 괜찮다.
서른여덟쯤으로 보인다고들 한다.
피부도, 몸매도 세월의 무게를 견뎌주고 있다.
영화 아델라인 속, 나이를 잃어버린 여인처럼은 아니지만,
흰머리는 어느새 가늘게 자라나고 있었다.
28살, 반지하 방에 살던 최상희는 이제 몇 조를 굴리는 여자가 되었다.
나쁘지 않은 인생이다.
통장엔 주식으로 번 돈만 5조 원이 넘는다.
언제까지 이 행운이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신이 내게 허락한 이 능력을 감사히 사용 중이다.
부동산 자산은 호텔 두 곳, 카지노, 골프장, 그리고 모슬포의 펜션 부지 2만평등.....
대략 1조 원 정도 된다.
딸은 스물일곱 살, 치과의사가 되었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며, 작년엔 같은 치과의사와 결혼했다.
지금은 부모님이 살던 2층집에서 함께 산다.
텃밭을 가꾸는 게 부모님의 유일한 취미다.
두 분 다 고령이라 이제 비행기도 힘들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서울로 올라가 안부를 전한다.
사위는 의사 두 명을 데리고 개인병원을 운영 중이다.
물론, 그 병원은 내가 차려준 것이다.
그리고 요즘 내게 가장 큰 기쁨은
딸이 임신 7개월째라는 사실이다.
딸 부부는 두세 달에 한 번씩, 나를 보러 이곳으로 2박 3일 머물러 간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내 주변은 그리 다르지 않다.
경호원들도 그대로, 승무원 출신 비서는 결혼해 떠났고,
화가는 재혼했다.
지금 내 곁엔 세 명의 여자가 남아 있다 본부장, 은정, 그리고 팀장 부인이다.
본부장은 연애 중이라 한다.
재혼 생각은 없고, 그저 “엔조이”라고 웃는다.
은정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끔은 나도 그런 상대 하나 있었으면 싶다.
부산엔 셋이 자주 내려간다.
1박 2일 혹은 2박 3일,
크루즈를 타고 가서, 돌아올 땐 비행기로 돌아온다.
섬이라는 특성상, 시선이 많고 소문도 빠르지만
이젠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내 측근들은 모두 나로 인해 풍족하다.
본부장, 은정, 경호팀장은 연봉 3억,
경호원 네 명은 2억을 받는다.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나 역시 그 대가를 아끼지 않는다.
나는 안전을 얻고, 그들은 부를 얻는다.
그들의 법인카드 내역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신뢰 위의 관계다.
살고 있는 한옥집은 여전히 고요하다.
2주에 한 번씩 여는 바비큐 파티는 한다.
이젠 조금 성가시지만 여전히 웃음이 많다.
진돗개는 다섯 마리로 늘었고, 고양이 세 마리는 마당을 거닌다.
털이 날려 방에는 들이지 않는다.
요즘은 요트를 알아보고 있다.
30톤급 하나를 사버릴까, 아니면 렌트로 즐길까.
결정은 아직이다.
어차피 겨울이라, 이런 고민도 6월쯤으로 미뤄둔다.
춥고 바람 센 1월에 바다 위를 떠다니는 건,
로맨틱보다 무모에 가깝다.
또 한 가지,
몇 년 전부터 마을 근처 절과 작은 교회에 헌금을 해왔다.
일요일이면 나와 측근들이 함께 교회나 절에 들러 점심을 먹고 흩어진다.
경호팀장도 자주 함께 밥을 먹는다.
토요일 오후부터는 경호 인원도 둘로 줄인다.
겨울은 호텔의 비수기다.
제주 처음 왔을 때 묵었던 호텔은 요즘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며
인수를 제안해왔지만 거절했다.
더 벌고 싶지 않다.
지금도 충분히 복잡하니까.
카지노는 여전히 성황이다.
특히 중국 손님들의 베팅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일요일 아침이다.
오늘도 교회로 향한다.
설교 말씀을 듣고, 점심을 나누는 일상이지만
그 평범함이 좋다.
목사님 부부는 쉰여덟 살 즈음,
부산에서 사업을 접고 이곳에 와 교회를 개척했다.
연고도 없이, 전 재산을 털어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다.
성도는 열 명 남짓,
절의 신도 수와 비슷하다.
나는 매달 많은 헌금을 한다.
정오가 되면 함께 점심을 먹는다.
그 식사 시간이 유난히 따뜻하다.
가끔 호텔 주방장이 와서 스테이크를 구워줄 때도 있다.
나는 사모님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남자들은 설거지와 세팅을 맡는다.
식사 후엔 오후 2시에 미리 저녁 예배를 드린다.
요즘 교회들이 대개 그렇다고 했다.
예배가 끝나면 차 한 잔을 마시며
백화점에서 사온 옷을 선물했다.
목사님 옷은 경호팀장이,
사모님 옷은 내가 직접 골랐다.
단정하고 우아한 옷,
그리고 세련된 속옷, 구두, 운동화까지 챙긴다.
두 분의 미소는 내 마음의 안식이다.
그분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말한다.
“회장님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 입니다.”
목사 부부는 주중엔 호텔에서 일한다.
목사님은 주차 관리, 사모님은 레스토랑 설거지.
수요일과 일요일은 쉰다.
그들은 직원이 아니라, 내겐 정신적 스승이다.
딸은 대전에 목사님에게 시집갔다고 했다.
절의 스님은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세 분 모두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오늘 저녁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로 대접했다.
가끔 호텔 입구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한다.
이렇게 일요일은 소리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분들 덕분에, 일요일이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니, 겨울눈이 내리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다.
불과 한 시간만 지나도 마당이 하얗게 덮일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
왠지 술이 당겼다.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야식하자, 회 좀 사와.” 하고 말했다.
잠시 뒤, 겨울 방어회가 도착했다.
양이 너무 많아 반이상을 남자 직원들에게 덜어주었다.
도톰하게 썬 살결이 윤이 났다.
그들은 별채에서 먹고, 나는 거실에서 혼자 잔을 기울였다.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고요한 세상이었다.
이런 밤에는, 누구라도 시인이 된다.
잔을 들고 하늘을 보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전 남편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한때 ‘핸드폰 오빠’라 부르던 사람과 임실 펜션에서 보냈던 겨울도 스쳤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술은 어느새 두 병째였다.
방어는 남김없이 사라졌고, 소주병이 텅 비었다.
괜히 허전해서, 소주병을 들고 경호원 숙소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남자 직원들이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팬티 차림으로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몸들이 다 좋네.”
내가 태연하게 말했지만, 사실 나도 순간 당황스러웠다.
수영장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얼른 옷 입어라.”
“네, 회장님!”
내 안주는 이미 떨어져 있었다.
남자답게, 이들은 양이 많은 안주를 한가득 준비해놓았다.
나는 소주 한 병을 더 나눠 마시며 같이 웃었다.
11시가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술기운이 퍼지자 그대로 잠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때는 새벽 다섯 시 반.
창밖은 새하얗게 덮여 있었다.
밤새 쏟아진 눈이었다.
속이 쓰렸다.
소주 두 병에, 경호원 방에서 마신 시바스 리갈까지 ....
몸이 버텨줄 리 없었다.
5시30분이 되자 경호원들이 기상했다.
“잘 주무셨습니까, 회장님.”
“응, 너희도 잘 잤니?”
“네, 회장님.”
“팀장 부부는 몇 시쯤 오지?”
“곧 도착하실 겁니다. 해장국 준비해 오시라고 했습니다.”
“잘했네. 밥도 있겠지?”
“예, 밥도 가져온답니다.”
예상대로 6시 정각, 팀장 부부가 들어왔다.
사골국 향이 퍼졌다.
“회장님, 샤워하고 오세요.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니,
팀장이 장작불을 피우고 있었다.
부인은 머리끝이 젖은 채로 김치와 밥을 세팅했다.
다섯 명이 식탁에 둘러앉아 사골국에 생김치를 곁들여 해장했다.
뜨끈한 국물이 속을 달래주었다.
남자들은 밥 두 그릇씩 비웠다.
나도 반 그릇 덜어주며 웃었다.
7시가 되자, 다른 경호 직원들이 출근했다.
“너희도 아침 먹어라.”
“네, 회장님.”
월요일이었다.
8시 정각, 주간 미팅이 시작됐다.
회의는 상희호텔과 카지노호텔을 번갈아 가며 열리는데,
월요일만은 정시 8시에 진행된다.
지난주 업무 보고와 이번 주 계획을 점검했다.
참석자는 본부장, 카지노호텔 사장, 카지노 지배인, 골프장 사장, 은정, 팀장, 그리고 나였다.
경호팀장은 참고 차원에서 배석시켰다.
회의가 끝나자,
“본부장, 카지노호텔 사장 두 분은 남으세요.”
나머지 인원은 커피숍으로 보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호텔 두 개 인수, 어떻게 생각합니까?”
“적자입니까, 흑자입니까, 아니면 현상 유지?”
본부장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현상 유지 정도로 보입니다.”
호텔 사장은 “적자 내지 현상 유지”라 답했다.
“결론은, 운영만 잘하면 유지된다는 거네요.”
“네, 회장님.”
“좋아요. 레스토랑으로 가서 차 한 잔 합시다.”
본부장이 전화를 걸었다.
“대추차 세 잔 부탁드립니다.”
“목사님께 한 잔 갖다 드리세요.”
“네, 회장님.”
잠시 후, 다시 전원이 모였다.
나는 아까의 질문을 모두에게 반복했다.
결국 의견은 같았다.
운영을 잘하면 현상 유지, 그 이상은 기대 어렵다는 판단이다.
“좋아요.”
본부장을 향해 말했다.
“호텔 사장 두 분과 오전 11시에 미팅 잡으세요. 내가 그리 갈 겁니다.”
“네, 회장님.”
“팀장, 10시 20분에 출발하자.”
“예, 회장님.”
시계를 보니 9시 반.
코트를 걸치고 혼자 호텔 산책로를 걸었다.
흡연실에 들어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유리창 너머로 목사님이 눈을 쓸고 계셨다.
“회장님, 대추차 잘 마셨습니다.”
“네, 목사님.”
두 호텔 인수 금액은 대략 2,500억 원이다.
건물은 오래됐고, 부지는 서귀포 쪽이 조금 더 넓다.
장사가 안 된다고 건물을 무너뜨릴 수도 없으니
괜히 사서 복잡해지는 일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손해보면 어때. 버는 것도 잃는 것도 다 내 선택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래, 인수하자.
호텔을 한 바퀴 돌았다.
시간은 10시 10분.
입구에 도착하니, 경호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본부장과 은정이 서 있었다.
“일단 가자.”
“네, 회장님.”
팀장이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두 명의 사장이 눈 덮인 정원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볍게 목례하고 악수를 나눴다.
주위를 둘러보니,
밤새 내린 눈이 나무 가지마다 곱게 내려앉아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하늘은 잔잔했고,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졌다.
하나가 내 손등에 내려앉았다.
살짝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하얀 세상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을 시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나는 이제, 세상 어느 곳에도 없던 여왕벌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