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를 찿아서 가는 나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머리가 멍했다.
차는 앞만 보고 달리는데, 생각은 제멋대로 흩어진다.
그래도 일단은 가보자. 이유 없이, 그냥 가보고 싶었다.
짐은 단출했다.
청바지, 셔츠, 잠바 한 벌, 화장품 몇 가지, 운동화, 슬리퍼정도이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앞으로 뭘 할지, 그때 가서 결정하자 마음먹었다.
오후 한 시쯤 출발해 향한 곳은 계룡산 근처 캠핑장이다.
특별히 아는 곳도 아니었다. 그냥, 이름이 떠올랐을 뿐이다.
해가 지기 전인 5 시쯤 도착했다.
예약도 없이 와서 좀 어설펐지만, 텐트 숙소를 잡았다.
싱크대, 침대, 에어컨, TV까지 다 갖춰진 ‘반캠핑형 텐트’였다.
입구 쪽 대형마트에서 소고기, 야채, 누룽지, 김치, 그리고 소주 한 병을 샀다.
혼자 먹기엔 충분했다.
불 피우기 귀찮아 프라이팬에 고기를 구워 소주 한 잔 기울이니,
하루의 피로가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이런 게 진짜 휴식인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잠이 들었다.
아침까지 푹 자고 일어나 계곡을 산책했다.
물소리에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소설책을 읽었다.
점심은 된장찌개, 저녁은 근처 식당에서 사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옆 텐트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같이 한 잔 하실래요?”
두 커플이었다. 30대초반으로 보여서 부담이 없었다.
서로 소개를 하던 중, 내가 “그냥 평범한 아줌마예요.” 하자,
그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럼 혹시… 골프 치세요?”
웃음 속에서 알아챘다.
네 명 모두 골프 프로였다. 신혼부부란다.
밤이 깊어질수록 웃음소리도 커졌다.
10시쯤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이 한 텐트 안으로 모두 들어가는 걸 보고 조금 당황했다.
“요즘은… 저런가?”
이해하려고 애쓰며 이불을 덮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함께 해장국을 먹으며 소주 한 병씩 나눠 마셨다.
아침부터 술이라니, 오랜만이었다.
저녁에는 내가 고기를 사오겠다고 약속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양주 몇 병까지 챙겨서 갔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웃음, 그리고 명함 한 장이다.
그녀는 말했다.
“언니, 꼭 놀러오세요. .”
그녀의 명함엔 ‘경기도 00 C.C 부사장, 레슨프로’라고 적혀 있었다.
그들이 떠난 뒤, 머리가 멍했다.
“세상은 참 다양하구나.”
그때까진 몰랐다.
이 캠핑장이 ‘성소수자들이 자주 오는 곳’으로 유명하다는 것이다.
그날 오후, 커피숍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는데
낯선 여자가 다가와 말했다.
“저도 담배 한 개 주실래요?”
웃으며 권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았다.
“혼자 오셨어요?”
“네. 사흘 됐어요.”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낯설고 편안했다.
“저녁 같이 하실래요?”
“좋아요.”
그녀의 텐트는 1호, 나는 9호였다.
6시에 약속하고, 양주와 소주를 들고 찾아갔다.
그녀는 이미 고기를 굽고 있었다.
나시 미니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화면에서나 볼 법한 사람이었다.
“혹시… 모델 하세요?”
“네, 케이블 방송에서 옷 프로그램 진행해요.”
그녀는 웃으며 자신이 나오는 유튜브 채널을 보여줬다. 구독자 50만 명이 넘는다.
“일 없을 땐 혼자 이런 데 와요. 조용하고… 사람들도 편해서요.”
“그럼 자주 오시겠네요.”
“그럼요. 여긴 편하게 남자 만나기도 좋고, 그냥 숨 쉬기 편한 곳이에요.”
그녀는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서울 오시면 밥 사드릴게요, 언니.”
우린 금세 친구가 되었다.
다음날 떠나면서 그녀가 말했다.
“언니, 꼭 연락해요. 기다릴게요.”
“응, 그럴게.”
그렇게 15일을 캠핑장에서 보냈다.
그후로는
지리산 피아골, 방화동계곡… 산과 물이 있는 곳으로 옮겨 다녔다.
처음엔 단순히 쉬고 싶었는데,
결국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됐다.
내가 생각한 캠핑은
불 피우고 고기 굽고, 비 내리면 그냥 바라보는 그런 거였는데,
정작 나는 식당에서 밥 사 먹고 텐트에서 잠만 잤다.
그런데도 좋았다.
산은 말이 없지만,
그 안엔 모든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도 조금은 새로워졌다.
다음엔 산을 사고파는 부동산 일을 해볼까.
“대자연이 함께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그게 앞으로의 내 삶과 닮은 방향 같았다.
한 달쯤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딸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일찍 잠이 들었다.
며칠을 그렇게 지냈다.
세상과의 거리를 잠시 두고,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그날 새벽, 빗소리에 눈이 떴다.
시계를 보니 5 시이다.
창밖은 잔잔한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당으로 나가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
빗줄기가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냥 서 있었다.
뜨거운 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 순간, 문득 웃음이 났다.
“행복이란 게 별건가.”
이렇게 티셔츠 하나 걸치고,
새벽 공기 속에서 담배 한 대 피우며
비 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게 지금의 나에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