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28살 그날의 빗소리

# 새로운 인생의 여정

by 전태현 작가
ChatGPT Image 2025년 10월 13일 오후 01_46_29.png




며칠 뒤, 사우나를 다녀온 나는 문득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방송국 모델, 그리고 골프장 프로이다.

한 달 동안 받은 명함이 고작 두 장이었고, 그 두 사람이 전부였다.



먼저 모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반가워요. 오늘 저녁에 뵈어요.”
“그래, 여섯 시에 보자.”



전화를 끊고 프로에게 연락했다.
“언니, 반가워요.”
“점심 먹을까?”
“네, 골프장으로 오셔요.”
“그래, 곧 갈게.”



차를 몰고 경기도 신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집에서 40분 정도 거리였다.


산자락 아래 도시의 아파트 단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아래로 36홀의 넓은 골프장이 펼쳐져 있었다.


늦 가을이라 라운딩 손님은 많아 보였다.


입구 쪽에는 작고 단정한 그물연습장이 있었다.

프로는 나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점심이니까 클럽하우스로 가요. 특별히 주문해놨어요.”
“그래, 들어가자.”



클럽하우스는 크고 깨끗했다.

룸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꼬리찜이 준비되어 있었다.

운전을 해야 해서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녀는 골프복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단정하고 날씬한 몸매에 긴 생머리가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여자는 옷이 날개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남편은?” 내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웃으며 말했다.



“언니, 사실 남편 아니에요. 저희 넷 다 미혼이에요.”
“그래? ”
“네. 부모님들이 골프장을 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요.

스무 살 이후로는 늘 한방에서 자고 지냈어요.”
“요즘엔 그렇게 지내는구나.”
“요즘엔 중학생도 첫 경험을 하는 시대잖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묘하게 가슴이 먹먹했다.



식사 후 카페로 옮겼다.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이 골프장을 운영했지만,

18홀을 36홀로 늘리며 대출이 불어나 지금은 적자라고 했다.



“아버지도 지금은 후회하고 계세요.

대출이 500억이에요. 이자에 인건비, 운영비까지…

이젠 팔고 싶어도 살 사람이 없어요.”



“얼마를 생각하고 있는데?”
“대출 500억에 나머지 천억이요.”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셔?”
“필리핀에요. 골프 치러 가셨어요. 어머니는 초등학교 때 돌아가셨어요.”
“그럼 너 혼자 여기 지키는 거구나.”
“네. 내일 아버지 오셔요.”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일 아버지 오실 때, 나도 올게. 함께 이야기해보자고 해.”
그녀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진짜요?”
“내가 헛소리하니?”



그녀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다음 날 아침,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담배 한 개비로 하루를 열었다.

비 오는 날의 담배는 이상하게도 더 진했다.


골프장에 도착하니, 그녀와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다.

사장실에 않아 내가 바로 말을 했다.

“대출 500억 빼고 1000억이면 되나요?”
사장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그럼 됩니다.”
“좋아요. 1500억, 지금 입금하겠습니다.”



나는 은행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모든 처리가 끝났다.
“직원 구조조정은 없어요. 친인척은요?”
“딸 하나뿐입니다.”
“ 내일부터 출근하겠습니다.”

사장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골프장을 나와 프로와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언니, 정말 대단하세요.”
“한 달쯤은 너도 같이 봐줘야지.”
“당연하죠.”



그날 오후, 병원에 들러 딸을 보았다.
“엄마, 왜 이렇게 기분 좋아 보여?”
“엄마, 골프장 인수했어.”
“진짜? 와, 엄마 멋지다!”
“넌 아직 골프 배우지 마. 지금은 병원 일에 집중해야지.”
“응.”



짧은 대화였지만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모든 일이 결국 딸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정시에 출근했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프로에게 말했다.


“사장실 네가 꾸며봐.”
“네, 회장님.”



점심에는 미역국을 먹었다.

식사 후엔 카트를 타고 36홀을 천천히 둘러봤다.

공을 치지도 않았는데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한 달 뒤, 프로는 유학을 떠났다.

모델은 방송국이 문을 닫으면서 실직자가 되엇다.

나는 그녀에게 프론트를 맡겼다.

그녀는 골프장에서 일하며 영상을 찍었고, 구독자 수가 20만 명이나 늘었다.


“언니 덕분이에요.”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깝지 않은 인생이면 됐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겨울이 오자 눈이 내려다. 생각보다 눈이 많이 내린다.


하지만 그 대신 잔디 위를 걸을 수 있었다.


눈 덮인 잔디를 밟을 때면 마치 천국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골프장 입구의 300평짜리 전원주택을 매입했다.

뒤에는 국유지 산이 있고, 소나무 가지마다 눈이 수북이 내려앉아 있었다.



담장은 높았지만, 풍경은 시골의 고요함을 품고 있었다.


넓은 마당에는 정원수가 몇 그루 서 있었고,

겨울 햇살이 흰 눈 위에 내려앉았다.



그날 저녁, 봉남이 엄마 집에 맡겨두었던 강아지 두 마리를 데려왔다.

마당에서 꼬리를 흔드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더이상 강아지가 아니다.



이 모든 일이, 결국은 사람과 인연, 그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리고 봉남이가 마당 관리 한번씩 해준다고 하니, 고맙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눈이 녹지도 않은 차가운 겨울 끝자락이었지만,

사람 손길이 닿으니 집이 조금 더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바람이 매서워 문틈마다 찬 기운이 스며들던 날,

나는 웃으며 딸에게 말했다.


“봄 되면 우리 마당에서 바베큐 파티 하자.”
딸은 그 말에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 무렵, 모델도 근처로 이사를 왔다.

이쪽 동네에 작은 평수의 빌라를 하나 매입했다.



처음엔 우리 집으로 들어와 같이 지내자고 했지만,

모델이 거절했다.
“같이 살면 언니가 불편할 거예요.”

그 말이 맞았다.


사실 나도 요즘엔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편했다.

세월이 흘러 마음의 소음이 잦아들자,

고요함이 오히려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집과 빌라 사이는 겨우 400미터 남짓이었다.

거의 같이 산다고 해도 될 만큼,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며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이 동네는 참 조용했다.


맥주 한잔 마시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은 클럽하우스에서 한잔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직원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태워다 준다.

요즘은 골프장에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일주일에 두세 번만 문을 연다.


그래서 대출 끼고 운영하면 감당이 어렵다.

그래서 다들 망하는 같다다.


나는 그저 골프장 입구에 선 채, 하얀 설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곧 봄이 오겠지. 따뜻한 봄이 많이 기다려졌다.



그리고 정말, 파란 잔디가 얼굴을 내밀며 올라오던 날이 왔다.
땅속에서 새싹이 비집고 나올 때마다,

마치 내 마음속에도 작은 희망이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골프장의 파란잔디위를 하루종일 혼자 걸어보고 싶었다.

이전 04화제24회.28살 그날의 빗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