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명동의 돈 주머니

by 전태현 작가












1996년 6월, 스물여섯의 나는 명동에서 ‘돈주머니’라 불렸다.



어르신의 가게엔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두 달에 한 번 정도 들렀지만 정확히 기억나지도 않는다.

내가 확신 있는 건 딱 하나였다.

1000억에서 시작한 투자가 어느새 2000천억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1년에 50% 가까운 수익이 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돈이 정확히 어디서 불어나는지는 나조차 모른다.

일산, 분당, 그리고 경기 일대의 땅을....
100억 단위의 거래는 이미 일상이었다.



오전엔 주식을 보고, 오후엔 땅을 보고 다니는 것이 하루의 구조였다.

두 달 전, 백령도에 사는 동생이 한 달을 내 집에서 지내다 내려갔다.



출근도 거의 하지 않고, 오랜만에 제대로 ‘사람 사는 시간’을 보냈다.
돌아갈 때 용돈을 넉넉히 쥐여주자 예전에 알던 누나가 아니라며 부담스럽다 했지만,

그래도 내가 전화하면 언제든지 올라오겠다고 말하던 아이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고향에서 경찰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어르신의 딸은 아직도 귀국하지 않았다.



비 내리는 토요일 아침.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최실장 부인이 아이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평소에도 주말 오전엔 집안일을 조금 도와주곤 했다.
도우미 부부가 있지만, 이래저래 최실장 내외가 와서 손을 보태준다.

“이모 보고 싶었어, 네?”
아이를 안아 올리며 내가 말하자 둘째가 내 품에 폭 안겨 웃었다.



아이들은 도우미 아주머니와 놀고, 경호원들과 최실장도 한참을 아이들과 뛰놀았다.

“오후엔 시골 좀 다녀오세요.”
내가 말하자 최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주—내가 살던 집으로 최근 처갓집이 이사를 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농사는 그만두고 경비 일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점심을 함께 먹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퇴근했다.



오후가 되자 비는 더 거세졌다.
바람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지금 모든 부동산을 현금화해 놓은 상태다.
손에 쥐고 있는 건 주식과 사채뿐이다.
사채에는 5000천억을 넣었다.
어르신보다 더 많은 금액이다.



내년부터 사채가 활발해질 것이고, 부동산과 주식 시장은 숨을 죽일 것이다.
부동산은 그때 다시 사들이고, 주식은 3년간 묶어둘 계획이다.


저녁엔 예전에 알던 국회의원과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검사 출신이라 인맥이 넓다.
지금도 충분한 인맥이 있지만, 서울 검사장 정도를 움직일 힘은 필요했다.
정치인들과 더 깊게 얽히고 싶진 않지만…

아직까지 나는 합법적인 일만 하고 있었다.



30층 건물 앞에 도착하니 빗줄기가 한층 굵어졌다.
엘리베이터로 올라가자 지배인이 직접 룸으로 안내했다.
악수를 나누고, 의원의 부인을 의자에 앉혀 드리자 두 사람 50대 초반처럼 보였다.
그녀는 대학 교수라고 했다.

“의원님, 얼굴 좋아지셨습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더 좋으신데요?” 의원이 웃으며 받아쳤다.
나는 교수의 옷차림을 보고 말했다.
“교수님, 정말 멋지십니다.”

그리고는 조금 주저하며 덧붙였다.
“제가 나이가 어려서… 뭐라 더 드릴 말씀이…”


“내년 선거는 잘 돼가시나요? 어디로 출마하실 생각이세요?”

식탁 너머에서 내가 묻자,

의원은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띠었다.

“더 큰일을 하려면… 지방보다는 서울로 나가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있는데, 도울 수 있는 데까지는 돕겠습니다. 공천만 받으세요.”

“네, 회장님. 감사합니다.”

“다음에 서울지검장과도 식사 한번 하시죠.”

의원은 표정을 굳혔다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도 정치에 뜻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도 소문으로는 들었는데, 아직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남은 6개월 준비 잘 하셔요.”



경호원을 부르자, 작은 가방 하나가 테이블 옆에 놓였다.

“현금 조금 담았습니다. 필요한 데 쓰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차에 실어드려라.”

“네, 회장님.”



그렇게 형식적인 저녁 식사는 끝났다.

사실 서로 특별히 나눌 이야기가 있는 사이도 아니다.
그들이 떠나고 레스토랑에는 8시의 조용한 공기만이 남았다.

창가 자리에 다시 앉아 와인을 홀짝이고 있을 때였다.
한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저… 여기 앉아도 될까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럴까요.”

지배인을 불러 가장 비싼 양주를 시켰다.



“술값은 제가 낼 테니 편하게 드세요.”

남자는 살짝 긴장한 듯 보였다.

“자, 소개 좀 해봐요.”

“댄스가수 K라고 합니다.”

“텔레비전에도 나와요?”

“네,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경호원을 불렀다.

“이 사람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니?”

“네, 가수 K 맞습니다.”

“그래, 알았어.”



가수는 유명인답게 깔끔한 인상, 큰 키, 좋은 몸, 그리고 어디서나 인기 있을 얼굴이었다.

“어쩌다 나한테까지 오셨어요? 여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을 것 같은데.”

“저… 회장님 알고 왔습니다.”

“어떻게?”

“조금 전에 의원님이 말씀하고 가셨어요.”



속으로 쓴웃음이 났다.
아, 의원이 돈값 제대로 하고 갔구나.

“몇 살이죠?”

“스물일곱입니다.”

술이 조금씩 오르던 중, 나는 물었다.

“여자들이랑 하룻밤 자면 얼마 받니?”

K는 대답을 망설이다가 결국 말했다.

“삼백에서… 오백 정도 받습니다.”

유명세를 생각하면 꽤나 큰돈이겠지.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집 가자.”

“네.”

의원이 이상한 사람을 붙여 보냈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 10시가 조금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도심의 불빛이 빗물 위에서 흔들리고,

그 사이로 젊은 댄스가수의 실루엣이 따라 들어왔다.
그 밤은 길었고, 묘하게 따뜻했으며, 어딘가 비현실적인 열기로 가득했다.
어쩌면 서로에게서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침 햇빛이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올 때쯤 눈을 떴다.
벽시계는 아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함께 샤워를 하고 나오자, 집 안엔 온기가 흘렀다.
나는 주방으로 내려가 해장국을 끓였다.
흰 김이 부드럽게 올라오는 냄새 속에서,

잠시나마 이 집이 누군가의 보금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해장국을 먹었고, 그의 손등을 스치듯 바라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봉투를 꺼냈다.
천만원이였다.
말없이 건네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래야 다음에 또 부르면 올것이다.



“나는 TV 안 보는데… 너 때문에 조금은 봐야겠네.”

슬쩍 농담처럼 말하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잠은 어디서 자니?”

“강남에서 부모님과 함께 삽니다.”



둘이서 마당으로 나왔다.
비가 그친 자리에는 흙 냄새가 짙었다.
담배 하나씩을 물고 불을 붙였다.
뿌연 연기가 머리 위로 천천히 흩어지며,

서로의 거리를 잠시 가렸다가 다시 드러냈다.



담배를 끝까지 태운 뒤 경호원을 불렀다.

“태워드리고 와.”

“네, 회장님.”



대문 앞까지 그를 배웅하며 잠시 멈춰 섰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이 새벽 안개처럼 흐릿했다.
나는 그를 가볍게 한 번 안아 주었다.

“또 보자.”

“네… 회장님.”

그가 차에 오르고, 대문이 닫혔고, 다시 고요했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출근하지 못했다.
아니, 못 한 것이다.
내가 어떤 밤을 보냈는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나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현관으로 들어서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돈이라는 건… 참, 묘한 힘이다.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꾸고, 마음의 빈자리까지도 잠시 눌러 채워버린다.


그러나 남는 것은 늘, 고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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