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by 전태현 작가

전태현의 유튜브입니다.

https://youtu.be/7WXe-10Q5XY?si=c0sRszlOG36lT1B3














아침에 눈을 뜨자 창밖으로 고요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세상이 펼쳐지니 괜스레 마음이 편안해졌다.
9시에 사무실에 도착하니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며 기분이 좋아진다.

개인비서라고 소개받았지만 사실은 이전 회장의 비서였다.



역시나 돈 많은 사람들은 비서도 예쁜 여자만 채용하는 걸까.?
누가 보아도 시선을 빼앗길 만한 몸매, 맑은 얼굴…
브라우스 아래로 터질 듯한 가슴은 묘하게 유혹적이기까지 하다.
25살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이 첫 직장이라고 했다.



코트를 벗어두고 창가에 서서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29층 높이에서 보는 도시는 거대한 생명체 같았다.
사람들은 저 아래 어딘가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마음에 든다.



변호사가 올라와 차를 한 잔 놓고 이런저런 브리핑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창밖의 눈, 그리고 묵직한 하루의 기운이 마음을 더 사로잡았다.

변호사가 나가고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이다.
2층 주식 객장으로 내려가 보았다.
지점장과 직원들이 공손히 인사를 건넨다.



객장 안은 이미 사람들의 열기와 욕망이 뒤섞여 작은 시장통 같았다.

올해 겨울은 이렇게 흘러갈 것이다.
봄이 오면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남자 직원이 커피를 내어왔다.
아이돌처럼 생긴 얼굴에 환한 미소까지…
웃으며 건네는 커피 한 잔이 이상하게 더 맛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전광판을 바라보니 오전장은 하락세였다.
특히 우량주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S전자, H전자, 다음… 줄줄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지점장을 불러 세 주식에 각각 500억씩,
신용 6배수로 매입하라고 전표를 끊어주었다.
총 9천억이다.
지점장은 곧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와 “회장님, 매입 완료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전광판에서는 더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괜찮다. 그대로 두면 된다.
오늘이 월요일이니 오후장에 더 떨어지면 추가로 살 것이다.

사무실 옆, 경호원 헬스클럽을 둘러보니 다들 운동 중이었다.
최 실장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필요한 기구는 모두 갖춰놨습니다.”
최신 러닝머신이 세 대나 반짝이며 서 있었다.
나도 한가할 때 운동하러 와야겠다.
“네, 아가씨.”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니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
“손님 오셨습니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또 다른 김지영이 서 있었다.



내 코트를 받아 걸어주며 “밖에 춥죠?” 하고 묻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30층 레스토랑은 나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처음이라며 함께 가서 먹자고 했다.

사장이 인사하며 안내했다.
둘이 닮았다고 할까 봐 그녀는 머리를 뒤로 묶은 것 같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그녀에게 먼저 주문하라고 하니 스테이크를 골랐고,
나는 같은 걸로 주문하면서 와인 한 잔도 곁들였다.

“이름이 같아서 서로 지영 씨라고 부르긴 좀 그러네요.”
그녀가 머쓱하게 말했다.

“그럼 편하게 회장님이라고 부를게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네, 회장님.”

식사가 나오기 전, 그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의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고
아버지 손에서 자랐다고 했다.
한글을 배우던 순간부터 아버지의 사채업을 자연스레 익혔다고한다.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의 업체를 물려받아
사채업을 이어갈 생각이라 했다.



아버지의 재산은 부동산, 주식, 그리고… 숫자로만 말할 수 없는 사채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숨은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지영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정말 사채시장에 뛰어들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상황 역시 숨김 없이 그대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채를 제외하면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취향을 몇 가지 물어보았다.
술은 마시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악세사리는 잘 하지 않고, 운동은 걷기나 달리기 정도이다.
헤어스타일은 늘 긴 생머리이다.



이 정도면 꽤 비슷한 점이 있긴 했다.

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웃음 속에 식사가 시작되었다.



지영의 입장에서는 아마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생의 나 자신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확신은 없었다.



모든 건 추측이고, 그저 스쳐가는 감정일 뿐이다.

차를 한 잔 마시고 시간을 보니 어느새 오후 2시이다.
1층까지 그녀를 배웅해주고 다시 주식 객장으로 내려갔다.
전광판은 오전보다 가격이 더 올랐다.
지점장이 다가와 말했다.

“전체적으로 7% 올랐습니다.”

“그대로 두세요.”

“네, 회장님.”

며칠 뒤, 다시 객장에 내려갔을 때 지점장이 자료를 들고 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100% 이상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전부 매도하세요.”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기다리자 지점장이 매도 내역을 가져다 주었다.
읽어보니 총 1,500억에 6배 신용매수였는데, 매도 자금이 3,200억이다.
며칠 만에 1,700억을 벌어들인 셈이다.
신용 6배의 힘이 이런 것이었다.



사무실을 나서 최 실장과 함께 15분 정도 걸어 어르신의 사채 사무실로 향했다.
도착하니 11시 30분. 점심시간이었다.

“어르신, 밥 사주세요.”

“그래.”

근처 순두부집으로 넷이 함께 향했다.
어르신은 최 실장을 보며 말했다.

“운동 많이 했구나.”

“조금 했습니다.”

“튼튼하니 보기 좋구나. 많이 먹어라.”

“네, 어르신.”



어르신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K광역시에서 일 많이 했더구만.”

“네. 하다 보니 이것저것 하게 되더라구요.”

며칠 뒤, 지영은 유학을 떠났다.
어르신에게 물어보니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무슨 공부하러 가는데요?”

“빌딩 인테리어 그런 공부한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나는 최 실장에게 이곳을 맡기고, 어르신 가게에서는 발을 뺐다.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정말 저들의 미래일까?
정말 과거의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정답은 없었다.
있는 것은 추측과 생각,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느낌뿐이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