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명동 들판에 서서

by 전태현 작가


https://youtu.be/7WXe-10Q5XY?si=CgJiTcz1Q2KOrjOM

P.s 백수 전태현의 하루 일과 영상입니다.






장마가 깊어졌다.
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졌고,
남산 자락에 자리한 집은 비가 내릴 때마다
더욱 산속 같은 고요를 품었다.



아침 9시의 출근은 변함이 없다.
출근이라도 하지 않으면 사람 얼굴을 볼 일이 없다.

집은 남산이라고 하지만,
문을 닫고 가만히 서 있으면 숲 속 한가운데에 있는 듯
새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린다.
그런 고요가 내겐 나쁘지 않다.



일주일쯤 지나면 장마도 끝이 나겠지.
휴가철이라 하지만, 어디로 갈 생각도 없다.
혼자 있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니까.
내성적 성향이라 어쩔 수 없다.

가끔 댄스가수가 와서
하루 이틀 자고 가는 것이
유일하게 내가 사람 냄새를 느끼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 또한 작은 낙이라면 낙이었다.



며칠 전 식사를 함께했던 국회의원이
서울지검장 부부와의 저녁 자리를 만들었다.
둘 다 검사 출신이지만,
그 국회의원이 선배라고 했다.
사람 보는 눈이 있는 이들이라서,
그래서 오늘, 우리 집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은 6시 30분이다.
3시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도우미 부부와 최 실장 부인은 이미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비싼 회와 랍스터가 식탁 위에 오르고,
와인잔이 가지런히 놓였다.



지검장은 앞으로도 몇 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더 위의 자리까지 손을 뻗을 생각은 없다.
그곳은 너무 복잡하고, 계산이 많다.
지검장 정도가 가장 알맞은 거리감이다.
돈으로 움직이기에도 적당하다.



보라색 미니 원피스를 골랐다.
귀걸이만 가볍게 하고 특별히 꾸미지 않았다.
이 자리에선 내가 갑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돈....그 하나면 충분했다.


6시 15분이다.
두 대의 차량이 빗줄기를 헤치며 들어왔다.
문 앞까지 걸어 나가 인사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지검장 부부도, 국회의원 부부도
겉모습만으로도 능숙한 품격이 배어 있었다.

“회장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부인들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가볍게 받아주었다.
“사모님들이 더 아름다우시죠.”



거실로 들어서자
껍질까지 정갈하게 손질된 랍스터와 회가
은은한 조명 아래에 놓여 있었다.
장맛비가 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식탁 분위기를 더 고요하게 만들었다.

와인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장마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정치와 세상 이야기까지
잔 속 와인처럼 천천히 흘렀다.



식사가 끝나자
최 실장 부인이 과일을 가져오고는
자리를 떴다.
그녀는 언제나 타이밍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인터폰을 눌렀다.

“최 실장.”

“네, 회장님.”

“차에 박스 하나씩 실어드려.”

“예, 알겠습니다.”



부인들에게는 천만 원을 넘는 명품 핸드백과
그 안에 누운 순금 1kg 바가 넣어져 있었다.

부인들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손끝에서 금의 무게를 느끼며 숨을 삼켰다.

지검장은 그 모습을 보고
부인들에게 말했다.

“여보, 잠깐 밖에서 비 좀 보고 오세요.”

문이 닫히자
방 안엔 단 세 명만 남았다.



빗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지검장이 재킷을 단정히 여미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실 게 있으신지요.”

나는 와인잔을 천천히 돌렸다.

“명동 사채업자들과 조폭들 흐름을
파악 좀 해줘요.
죄목이 될 것들도 같이 정리해주고.”



지검장은 고개를 숙였다.
“예, 회장님.”

“그리고 국회의원님.”
내가 옆에 앉은 그를 바라보았다.
“공천만 받으시면, 제가 확실하게 후원할게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난 당분간 사업 크게 벌일 생각 없어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지검장님. 나중에 사무실에 놀러갈게요.
차 한 잔 주시죠?”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회장님.”

그렇게 30여 분 동안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비 소리와 함께 잔잔히 흘렀다.



밖에서 다시 문이 열리고
젖은 우산을 들고 들어온 두 부인의 웃음소리가
방 안의 무거운 공기를 부드럽게 풀어냈다.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두 대의 차량은 다시 장맛비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남은 것은 고요와,
창밖에 끝없이 떨어지는 비뿐이었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9월의 공기가 서서히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장마가 걷힌 자리에는 맑은 하늘이 떠 있었고,
나는 뒷산을 오르는 일을 하루의 일과처럼 삼았다.



땀이 흐르는 순간마다
마음의 먼지까지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단순한 움직임이 힐링이 될 줄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다.

직원들은 교대로 일주일씩 휴가를 다녀왔고,
사무실에는 가을 햇빛만큼 잔잔한 여유가 머물렀다.



어느 날, 지검장에게 전화가 왔다.
차 한 잔 하자며 사무실로 오라는 이야기였다.
아침 10시이다.
서울지검 건물에 도착하자
지나가는 사람마다 검사의 표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다들 서류를 들고 분주히 움직였고,
그 속에서 나는 일시적인 외부인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검장실에 들어서자
비서가 향기 좋은 녹차를 내왔다.
따뜻한 잔 위로 가을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검장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는
마치 이 도시의 숨겨진 혈관을 펼쳐놓은 것처럼
조폭 계보와 명동 일대 사채업자들의 흐름을
꼼꼼하게 정리한 문서였다.



“명동 주변으로 4개 조직폭력배가 있습니다.”
지검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대형 사채업체가 3 곳.
어르신께서도 그중 한 곳에 포함돼 있습니다.”

그는 펜으로 한 줄을 그으며 말했다.

“명동을 정리하시려면
조폭이 먼저 정리돼야 합니다.
그다음이 사채업자들이고요.”



나는 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두 곳… 성향이 어떤가요?”

“한 곳은 회장님과 함께 일을 시작했던 곳이고,
다른 한 곳은 후발주자지만 자금력은 1위입니다.
둘 사이 관계는 좋지 않습니다.”



조폭들의 수입 구조를 묻자
지검장은 준비된 답을 내놓았다.



“술집과 나이트클럽입니다.
명동 주변에 나이트클럽이 4 곳 있는데,
각 조직이 하나씩 맡아 운영합니다.
수입의 절반이 거기서 나옵니다.”

“나머지는?”

“단란주점, 룸살롱, 호텔, 모텔…
명동의 밤거리 대부분이죠.”



나는 의도적으로 가볍게 웃었다.

“서로 싸우기라도 하면
절반은 자연스레 정리되겠네요.”

지검장은 난처한 듯 미묘하게 웃었다.

“이론상은 그렇지만…
그들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가 많습니다.”



“그럼 가장 큰형이 운영하는 곳은?”

“00나이트클럽입니다.”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지검장님은 두목들을 아시나요?”

“저는 아닙니다.
담당 검사들이 있습니다.”

“그럼 담당 검사 네4명,
오늘 저녁 6시에 00식당으로 오라고 해주세요.
밥은 제가 삽니다.”

“네… 회장님.”



그날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지검장과 함께 간단히 먹었다.
오후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일을 보았다.
해가 질 무렵 00식당에 도착하자
검사 네 명이 먼저 와서 정중히 인사했다.



“앉아요. 편하게 저녁 먹읍시다.”

“네, 회장님.”

술잔을 가볍게 돌리며 나는 질문을 던졌다.

“두목들 관계는 어떤가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구역 싸움이고…
전쟁 직전입니다.”

“전쟁이 나면?”

“죽거나, 구속되거나…
많은 상황이 벌어지죠.”


나는 명함을 꺼내
검사 네 명에게 하나씩 건넸다.

“00나이트클럽으로 넘어가서
술 한잔 합시다.”



검사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희가… 거길 가면—”

“손님이잖아요.
걱정 마요.
돈은 내가 냅니다.”

그 말에 그들은 더 말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밤 9시이다.
나이트클럽 입구의 네온사인이
비가 그친 차가운 공기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지배인이 검사들을 알아보고
급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룸으로 안내받아 앉자
웨이터가 다가왔다.

“지정 아가씨 다섯 분 모셔오겠습니다.”

그 말은
이 밤이 어디로 흘러갈지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가을밤의 공기,
네온의 빛,
그리고 조용히 시작된 움직임들...
명동의 그림자는 그렇게
서서히 나에게로 기울기 시작했다.



술잔이 서너 번 오가고 나니,
문이 열리며 지정 아가씨 다섯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명에 반사된 실루엣이 부드럽게 흔들렸고,
그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각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는 잔을 들었다.



“건배하시죠.”

잔들이 한순간 투명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그러나 오늘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흥을 돋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구경—명동이라는 거대한 판의 맥을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웨이터를 불렀다.

“양주 비싼 걸로 세 병 더.”

웨이터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마치 돈보다 부담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처럼.

“지금까지 술값이 얼마죠?”

“삼백만 원… 입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을 건넸다.

“내가 냈으니 이제 웃어.”



그제야 웨이터의 얼굴에 형식적인 미소가 희미하게 번졌다.

대형 룸에서 한 시간 정도 흘렀을 때,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목적은 이미 충분했다.



밖으로 나오기 전,
나는 검사들 넷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주머니마다 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씩을 넣어주었다.

“다음에 또 봅시다.”



검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은
자존심과 계산이 동시에 섞인,
어쩐지 어둡고 투명한 풍경 같았다.

나이트클럽 문을 나서자
밤공기가 차갑게 폐 속으로 들어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들이켰다.
한숨처럼 연기가 퍼졌다.



명동을 움직이는 각 조직의 두목들이
묵직한 걸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나는 담배를 들고 그들을 바라봤다.

“싸우러 온 건가?”
“아닙니다, 회장님. 담당 검사님들이 계셔서 인사하러 온 겁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 오는 여름밤에 벌어졌던 일들이
서서히 가을빛으로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집에 가자.”

“네, 회장님.”

차 안은 조용했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눕히는 순간
피곤함이 한꺼번에 밀려 들었다.

술 기운이
천천히 혈관을 따라 퍼지더니
마치 수면제처럼 의식을 잠식했다.



그날 밤,
나는 아주 깊고 조용한 잠에 빠져들었다.



https://www.youtube.com/@%EA%B7%B9%ED%95%9C%EC%83%9D%ED%99%9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