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곡의 부르스
새벽녘, 이른 시간에 눈이 떠졌다.
알몸인 채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창밖을 바라보니,
하얀 눈발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찼다.
“이래서 사람이 생각이 많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
문득 그런 생각마저 스쳐갔다.
나는 살색 스타킹에 흰색 정장을 갖춰 입고, 붉은 코트를 걸쳤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경호실장이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그는 묵묵히 나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 한잔을하고 나서 현관을 나서자 네 명의 경호원이 정중히 인사를 하며 식당으로 안내했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곧장 목포로 향했다.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이었다.
눈발은 여전히 흩날렸고, 이른 시각이라 도로엔 차량이 드물었다.
서해안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차는 한결 시원하게 뻗어 나갔다.
부모님 댁은 목포해양대학교 인근, 그 이름난 북항 근처였다.
십여 년 전 내가 사드린 전통 한옥인데, 세 채 중 한 채를 허물어 텃밭을 만들고,
두 분은 그곳에서 소박히 살아오셨다.
전날, “밥과 국만 준비하세요.” 라고 전화드렸었다.
연세 드신 분들께 10인분의 음식을 마련하라는 건 고된 일이었기에
대신 나는 북항에서 회와 고기를 미리 주문해 두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머니가 나를 끌어안으며 말씀하셨다.
“회장님 돌아가셨다는 뉴스 봤다. 괜찮은 거지…?”
“응,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나를 꼭 안아주시며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눈 내린 길은 얼어붙어 있었고, 결국 5시간이 걸려 고향 집에 도착한것이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어머니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반찬을 준비해 두셨다.
“엄마, 뭐 하러. 내가 사온다 했잖아요.”
“그래도 손님이 열 명이나 오는데 어쩌니.”
부모님은 경호원들의 존재도 이미 알고 계셨다.
모두 함께 점심을 나누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오후 세 시가 되었다.
나는 부모님을 안아 드리며 말씀드렸다.
“장례가 끝나면 또 올게요.”
다시 차에 올라오는 길,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젊은 딸이 늙은 회장의 첩으로 산다는 사실이,
부모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호텔에 도착하니 밤 여덟 시가 넘어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아홉 시 무렵 방으로 들어오자 경호실장이 찾아왔다.
내가 불렀다.
술 한 잔을 나누고 싶었다.
그는 경호회사 대표이자, 전직 청와대 대통령 경호원이었다.
십여 년 전 청와대에서 나를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마흔 초반의 나이, 쌍둥이 딸을 홀로 키우며 살고,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라 했다.
나는 술잔을 따르며 말을 건넸다.
“남은 닷새 동안 잘 부탁드려요. 일이 마무리되면 따로 더 사례비 드릴게요.”
그는 고개 숙여 답했다.
“네, 사모님. 최선을 다해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양주 한 병을 함께 비운 뒤, 그는 숙소로 돌아갔다.
회장님의 발인 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발인은 아침 아홉 시 반,
큰아들에게는 아홉 시까지 도착하겠다고 전해 두었다.
이동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평소라면 30분이면 도착할 길이지만,
눈길이라 오십 분은 잡아야 했다.
이번 경호 인원은 무려 30명, 지난번보다 훨씬 강화된 경호였다.
이동 중 나의 신변이 가장 위험하다.
다섯 대의 차량이 호텔 정문에서 대기했다.
나는 두 번째 차에 경호실장과 함께 탑승했다.
예상대로, 길은 얼어 정체가 이어졌다.
경호실장이 말을한다.
“사모님, 차량이 따라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들은 아마도 내 차 번호를 알고 있을 터였다.
터널을 지나 한적한 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갑자기 25톤 덤프트럭이 들이받아 경호차 한 대가 전복됐다.
터널에 들어서서 미리 경호실장이 나를 다섯 번째 차로 옮겼다.
그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아침 8시55분, 우리는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큰아들이 나를 맞이했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메라 앞이라 둘째와 막내딸 역시 무표정하게 인사할 뿐이었다.
잠시 후에 회장님의 영정 사진이 나오고 관이 뒤를 따랐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지난 20여년, 오직 나만을 사랑해주고 아껴주셨던 분이었다.
그의 사랑은 진심이었음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영정을 쓰다듬으며, 나는 그분을 영원한 안식의 품으로 보냈다.
장례가 끝나자 모두들 흩어졌다.
남은 것은 큰아들의 경호원과 나의 경호원들뿐.
소리없이 눈이 내렸다. 큰아들이 우산을 내 위로 쒸어주며 같이 걸었다.
“아침 사고 소식, 보고받았습니다.
아주머니 생각에는 단순한 사고였다고 보십니까?”
“사고가 아니야.”
“그 말씀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누가…?”
“나 어디 있는지 알지?”
“네.”
“오늘 저녁, 조용히.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호텔로 와. 할 말이 있어.”
“알겠습니다. 저녁 일곱 시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날 경호원 50십여 명의 경호 속에 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1층 커피숍에서 창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니,
가슴이 싸늘히 식어 내려갔다.
회장님의 장례는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진실을 밝혀내는 일뿐이었다.
경호실장을 손짓해 불렀다.
그 역시 말이 없었다.
나도, 그도 그저 묵묵히 커피만 마실 뿐.
어쩌면 지금은 말보다 침묵이 더 무거운 대화일지 몰랐다.
저녁 여섯 시가 넘어, 나는 모든 경호원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유언장대로라면,
막내딸—그 사악한 여인이 그룹 회장의 자리를 승계받게 되어 있었다.
곧 벨이 울렸고, 경호실장이 말했다.
“큰아드님 오셨습니다.”
시계를 보니 7시 5 분 전이었다.
우리는 마주 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회장님 유언, 너도 동의하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유언장이 조작된 거라면 어쩌겠어?”
큰아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조작이라니요…?”
나는 핸드폰 속 영상과 서류를 내밀었다.
그 순간, 큰아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것들이…!” 그는 분노를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 오늘 아침의 사고가 이해가 되겠니?”
그리고 나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몇 해 전 네가 물에 빠졌던 그 사고도… 우연이 아니야.
어제 막내딸에게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도 들었다.
이사회까지는 네가 회장님의 권한대행이다.
최대한 빨리 범죄의 증거를 수집하고, 이사회를 열어 네 자리를 찾아가라.”
큰아들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왜 저를 돕는 겁니까?”
“회장님의 마지막 유언이었어.
그리고 약속대로 모든 것이 정리되면 나는 서울을 떠날 거다.”
“원본은 네가 가지고 있으면… 너는 죽는다. 내가 보관할게.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다.
오늘 아침 사고의 배후, 네가 반드시 밝혀내야 해.”
큰아들은 가방을 내게 내밀었다.
“여기, 5억입니다. 경호 비용으로 쓰십시오. 마음 놓고 지출하세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이사회는 3주 뒤에 열립니다. 그날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경호실장을 불러 들였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경호실장에게 직접 전달해라.”
“네, 아주머니.”
경호실장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큰아들이 다시 지갑을 열어, 수표 세 장을 꺼냈다.
“수표 1억짜리 세 장입니다. 앞으로 3주 동안 저희 아주머니 잘 지켜주세요.”
“알겠습니다.”
“경호 비용은 모두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렇게 큰아들은 돌아갔다.
시간을 보니 밤 아홉 시.
한 달 경호 비용으로만 4억을 지출한것이다.
내일 하루만 더 호텔에 머물고, 곧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답답한 호텔 생활은 오래 할수가 없었다.
나는 경호실장을 불렀다.
“술 한잔하고 싶네.”
이야기를 나눌 사람조차 없는 지금, 이것이 진정한 고독이었다.
양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랑 부르스 한 곡만 춰줄래요?”
“네, 사모님.”
음악에 맞춰 그의 넓은 가슴에 기대 눈을 감았다.
행복했던 회장님과의 추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남자의 바다 같은 가슴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나는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속삭였다.
“고마워요. 내일 아침에 봐요.”
“네, 사모님.”
창밖엔 여전히 눈이 내렸다.
겨울이기에, 차라리 좋았다.
그렇게 호텔에서 7일을 지냈다.
아침에 경호실장을 불러 큰아들이 가져온 현금 5억 전부를 건넸다.
“이사회가 끝날 때까지 내 경호를 부탁해요. "
나머지 현금은 비상금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도우미 아주머니 두 분과 정원 관리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경호실장이 먼저 도착해 집 안 구석구석을 확인하고,
도청이나 카메라가 없는지도 점검해 두었다.
그 사이 정원 관리사가 울타리를 높였다.
마치 38선처럼 철조망으로 둘러친 모습이었다.
눈발은 흩날렸지만, 정원과 마당은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집 안은 어제부터 청소가 말끔히 끝나 있었다.
산속에 서 있는 나무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하얗게 빛나는 풍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가사 도우미에게 특별히 음식을 차리지 말라고 했다.
“경호동에서 먹는 것 조금만 가져와요."
"우리는 갑을 관계가 아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3주 동안은 외출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안에 갇힌 먹이처럼, 이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노출되어 있는 편이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며칠 뒤에 거실 난로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밤 9시30분이다.
창밖을 보니 경호실장이 눈 내리는 밤에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손짓해 불러들였다.
저녁에 남은 찌개를 데우고, 소주를 꺼내 함께 마셨다.
그가 두 잔, 내가 다섯 잔을 마셨다.
그의 눈빛은 묘하게 따뜻했다.
내가 부르스 한곡을 청하였다.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어 부르스를 함께 추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르스 한 곡이 이토록 큰 위로가 되어줄 줄 몰랐다.
아니, 작은 위로가 아니라 큰 위안이었다.
"긴장이 풀리니 사실 남자의 품이 많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가 나간 뒤, 나는 소주 한 병을 더 비우고 침대에 쓰러져 잠에 빠졌다.
“아름답고 행복한 꿈을 꾸고 싶었다.
구름 위를 걸어다니는… 그런 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