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작은백합

# 허무한 작별인사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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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눈 내리던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결국 두 번째 뇌출혈로 쓰러졌다.

고령이라는 이유로 수술은 어렵다는 의사의 판단이 내려졌다.

그리고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수아의 독백


유언장이 낭독될 때, 나는 법적 상속인은 아니었지만,

근 2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여자로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낭독이 끝나자, 말없이 병원 1층 흡연실로 내려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의 연기가 폐 깊숙이 스며드는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회장님은 절대 저런 유언을 남기실 분이 아니야.



이미 받을 몫은 다 받았기에 미련은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유언장은 조작되었다.”

세 개의 담배를 연달아 피워 물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 여덟 시였다.

오늘은 병원에서 묵고, 아침에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병실로 올라가는 길, 막내딸과 마주쳤다.

“아버지는 안 깨어나셔요. 의사도 이미 포기했어요.”

그리고 내 귓가에 바싹 다가와 속삭였다.

“아줌마, 오래 살고 싶으시면 입 다물고 계세요.

뻥긋도 하지 말고,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사세요.”



그 말 끝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기고 복도를 사라졌다.



병실 안에는 큰아들이 앉아 있었다.

“집에 들어가 쉬어라. 내가 있을테니.”

나는 그를 일으켜 세우고 병실 밖으로 보냈다.


큰아들과는 그나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그러나 누워 있는 회장님의 얼굴을 바라보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막내딸의 말은 결코 가벼운 협박이 아니었다.

그날 밤, 자정까지 회장님의 손을 붙들고 혼자 눈물을 흘렸다.



죽은 서방보다, 병들어 누워 있는 서방이라도 곁에 있는 게 낫다고 말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었다.

꿈결에 누군가 내 손을 더듬는 느낌이 전해졌다.


눈을 뜨니, 회장님의 손가락이 내 손등을 스치고 있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있어 줘서 고맙다. 내가 죽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떠나라.”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마지막 비밀을 내게 남겼다.



“내 침대 밑에 금고가 있다. 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



그리고 마지막 숨을 내쉬며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89세였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달려와 심폐소생술을 이어갔지만, 끝내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에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회장님은 차가운 냉동고로 옮겨졌다.

나는 큰아들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발인 날 올게.”

그는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네, 아주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경호원들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와 정원 관리인만 남아 있었다.


넓은 집에 단 세 사람뿐. 그날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전에 도우미가 아침상을 차렸다.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장례 끝나고 다시 오세요.”

정원 관리인과 함께 둘 다 휴가를 주었다.



집이 고요히 비어 있는 틈을 타, 안방으로 들어갔다.

침대를 밀고 카펫을 들어 올리자, 나무로 가려진 사각 틈이 드러났다.


그것을 걷어내니, 정말 금고가 있었다.

생일 날짜를 눌렀다.

철컥― 금속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는 밀봉된 노란 행정 봉투, 그리고 무기명 채권 뭉치가 있었다.

그 가운데 자필로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네가 이 금고를 열었다면, 이미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잡아 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 채권은 천억 원이다.

네가 반드시 해결할 것이라 믿고 남기는 선물이다.

사랑한다, 내 여자 수아야.”



법무법인의 직인이 찍힌 유언장, 그리고 CD와 USB도 있었다.

노트북에 연결해 확인하니, 회장님이 80세에 직접 작성한 유언장이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다시 확인했다.

날짜, 도장,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둘째와 막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분명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 머무르는 것은 위험했다.

현금과 귀금속, 옷가지만 챙겨 가방에 담았다.

침대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차에 올랐다.



그러나 대문을 나서자마자 백미러 속에서 검은 차 한 대가 뒤따라왔다.

단순한 미행일까.

차들이 오가는 낮이라 그나마 안심이었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차를 세우고 급히 휴대폰을 켰다.



서울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안전한 호텔을 검색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호텔 시그니엘이다.

곧장 전속력으로 그곳을 향했다.


번화가로 들어서자 마음이 놓였다.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웠다. 멀리 거대한 호텔 건물이 보였다.



이 차조차 믿을 수 없었다.

추적 장치, 녹음기… 무엇이든 심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호텔 입구에 닿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자 호텔 보이가 다가와 안내했다.

처음 들어서는 초고층 호텔이다.

500m가 넘는 건물은 내 신변 보호에 최적이었다.

호텔 매니저를 불러 제일 좋은 방을 7일간 예약했다.



그리고 신변 보호를 의뢰하자, 계열사 경호 업체 소속 직원 10명을 소개받았다.

그 자리에서 계약을 체결하고 1억을 결제했다.



금고에 유언장과 자료들을 보관한 뒤,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

긴장이 풀리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발인 날 아침에 장례식장으로 가기로 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낯설고도 새로웠다.

저녁 여덟 시, 경호원들과 함께 30층 식당에서 고기 파티를 했다.

모두에게 오늘은 쉬라 일렀다.

내일은 살던 집으로 돌아가 필요한 물건을 챙길 생각이었다.



아홉 시 반, 식사가 끝나자 경호원들이 방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양주 몇 잔을 들이킨 뒤,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머리가 놀랍도록 맑았다.

마치 어제의 일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경호원들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는 곧장 살던 집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리던 중, 경호책임자가 말을한다.

“사모님, 차 한 대가 계속 뒤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제 동선을 파악하는 중일 겁니다.”



그 차는 결국 집 앞 대문까지 따라왔다가 멀찍이 주차한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경호원들이 넓은 저택을 보고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내 집이에요. 차 한잔들 하시겠어요?”

여자 경호원 둘과 함께 차를 준비했다.

이들은 권총만 없을 뿐, 충분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기에 마음이 놓였다.



급히 나오느라 챙기지 못했던 내 방의 금고를 열어 현금을 꺼냈다.

삼억 정도였다.

나는 경호원 열 명에게 각각 천만 원씩 건넸다.



“7일 동안, 저를 잘 지켜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모님.”

그들의 눈빛에서 이미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기색이 비쳤다.



도우미가 준비해둔 반찬이 있어 내가 직접 점심을 차려 경호원들과 함께 식사했다.

막상 밖에 나가도 갈 곳이 없었으니, 잠시나마 여유로운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중, 저택 안으로 검은색 승용차와 봉고차들이 들어섰다.

“경호! 경호!”

경호실장의 날 선 외침이 울려 퍼졌다.



차에서 막내딸이 내리자, 건장한 청년 스무여 명이 뒤이어 내려섰다.


경호원들은 가스총과 삼단봉을 들고 현관 앞에 일렬로 사열했다.

상대 청년들 또한 줄지어 서 있었다.


한마디만 떨어지면, 조폭들의 난투극이 벌어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막내딸이 느릿하게 다가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뭐 대단한 거라도 가지고 있나 보네요, 아줌마.”

나는 차갑게 응수했다.
“여긴 내 집이야. 여기서 싸우면 너만 다쳐.”

막내딸은 싸움을 걸 생각은 없는 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말해주러 왔어요.”



그녀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무장 경호원들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막내딸은 내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표정이다.

막내딸은 경고를 남기고 차에 올라 돌아갔다.


그렇다. 이번 방문은 협박이 아닌,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장례가 끝날 때까지는 저들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방심하는 순간,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어두워지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했다.



필요한 것은 이미 챙겼다.

당분간 이 집에 돌아올 이유는 없다.



호텔로 돌아와 경호원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저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어요.”



호텔 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평안이 찾아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묵직한 물음이 맴돌았다.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끝없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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