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작은백합

# 끝없는 갈망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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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였을까?.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는데,

수아가 저수지 앞에서 내 손을 잡아줄 때마다 나는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꼈다.


그녀의 눈빛만 마주쳐도 천국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이곳에 이사 온 지도 오래되었다.

아쉬운 것은, 내 기억은 여전히 통영의 열네 살 소년에서 멈춰 있는데,

내 몸은 이미 늙어버려 걷는 것조차 숨이 찰 정도로 쇠약해졌다는 사실이다.

거울 속 주름진 얼굴을 볼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 인생의 목표이자 꿈이었던 계열사는 이제 세 아이가 나눠 운영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힘은 여전히 내 손에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다.



집 옆에는 경호동을 지어 스무 명이 넘는 경호원이 교대로 나를 지킨다.

월요일이면 일부러 출근해 계열사 사장들과 점심을 하고,

수요일 점심은 세 아이들과 약속을 잡는다.



그러나 수아는 오지 않는 날이 많다.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녀를 불편해 하고 수아 역시 그 눈빛을 감당하기 힘들어한다.




불편한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혼인신고를 하면 재산이 4등분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수아는 아이들에게 수도 없이 말했다.



“혼인신고는 하지 않겠다. 회장님이 떠나면, 나도 함께 이곳을 떠나겠다.”



아이들은 자라며 배다른 형제라는 벽을 더 뚜렷이 드러냈다.



내가 살아 있을 동안 분명히 정리해 두지 않는다면,

내 죽음 이후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질 게 뻔하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인근 칠만 평의 산을 수아 명의로 해주었다.



언젠가 개발될 곳이다.

그녀의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보장이다.



늦가을, 단풍 물든 산을 바라보며 낚시를 하던 날 문득 깨달았다.

내 몸은 이제 난로를 켜주는 경호원들의 손길에 의지해야 할 만큼 늙었다는 것이다.

10월인데도 추위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수아는 강아지들과 놀고 있었다.

아직은 휠체어 대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겐 기적 같았다.

그녀는 아침마다 필라테스와 헬스를 하고 점심 무렵 돌아왔다.



한 달에 한 번쯤은 혼자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나는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요즘 내 고민은 단 두 가지다.


첫째, 회사를 어떻게 아이들에게 분란 없이 물려줄 것인가.

둘째, 수아가 정말로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견딜 것인가.



수아는 내게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다 주었고 그녀의 아들 유학도 내가 먼저 제안해 보내주었다.

그녀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내 곁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점점 더 욕심이 난다.



내 몸은 늙어가도, 나는 여전히 남자다.

나는 인정한다.

수아에 대한 집착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 집착을 드러내는 순간 그녀는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 밤 그녀가 떠날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싸운다.



#수아의 독백


나는 회장님께 늘 감사했다.

나를 상류사회의 여자로 만들어주신 분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오래전 이야기다.

지금은 아니다.


회장이 죽고 나면, 나는 이 집에서 살림 하나조차 가져갈 수 없다.


장례식장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있기는 불편하다.

특히 둘째와 막내딸, 그 눈빛은 내가 숨 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내 손에 쥔 건 300조가 넘는 재산중에서 100억 남짓한 주식과 부동산,

그리고 회사 이사직에서 나오는 월급뿐이다.

필요한 것은 마음껏 쓸 수 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더 욕심을 내고 싶은 갈증이 치솟는다.



나는 안다. 회장이 몇년전부터 나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집착이 깊어질수록, 나는 원하는 것을 더 얻을 수 있다.



만약 내가 J전자 주식 백억 원어치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회장은 줄 것이다. 나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세 아이들은 1조를 쥐여줘도 싸울 인간들이다.

그 전쟁 속에서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내 유일한 도피처는 남자다.



나도 많이 변했다.

회장을 만나기 전, 나는 맑고 청순한 영혼을 가진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여기는 정글보다 더 무서운 곳이다. 방심하면 잡아먹힌다.


세 아이들은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식들이다.

특히 막내딸, 그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등골이 서늘하다.

그녀는 나를 조용히 없애버릴 수도 있는 아이일 것이다.

혼인신고를 하자고 말한다면, 그날 밤 나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제는 수아와 잠자리도 불가능하다.

아니, 내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

여든 후반을 넘어버린 나, 이 늙은 육신을 묵묵히 보살펴준 저 여인에게 나는 늘 감사한다.



그러나 감사와는 별개로 내 안의 소유욕은 버려지지 않는다.


때로는 상상한다.

수아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는 그런 상상조차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단 한 가지다.



내 여자, 수아가 떠난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지금 내 마음이 기댈 수 있는 곳은 그녀의 작은 가슴 한쪽뿐이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물처럼 흘러간다.


아이들의 재산 상속 문제는 날로 심각해졌다.



특히 둘째 아들은 장남을 향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고 막내가 그를 지원했다.

두 아들이 회사 안에서 주먹다짐을 벌여 장남이 입원하는 일도 있었다.



장남은 온순한 편이지만, 둘째는 내 아이임에도 사악한 기질을 감출 줄 모른다.

반대로 막내딸은 언제나 천사 같았다.


어쩌면 어머니의 피가 달랐기 때문일까?.



2018년, 내 나이 여든여덟.

거실을 걷다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열 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겨우 살아났고, 긴 입원 끝에 드디어 퇴원하는 날이었다.



수아와 세 아이, 그리고 손자·손녀들까지 모두 모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막내딸을 제외하고,

두 아들은 각각 두 아이씩을 낳아 네 명의 손자·손녀를 내게 선물처럼 안겨주었다.



4월 17일, 화사한 봄날의 퇴원은 기쁘면서도 씁쓸했다.

아이들은 주치의와 간호사를 집에 두길 원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내 곁에는 수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니 마당이 휠체어가 다니기 편하도록 정비되어 있었다.

한 달 남짓 병원에 있는 동안 집안 인테리어도 크게 바뀌어,

현관에서 나오기 쉽게 구조가 달라져 있었다.



가사도우미가 환영해 주었고,

주·야간을 교대로 간병하는 간호사 두 명도 와 있었다.



나는 이제 아침 아홉 시가 되어야 겨우 일어난다.

샤워도 수아의 손길에 의지해야 한다.

내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태. 회사의 보고는 10분 정도로 줄었다.



#회장의 독백


휠체어를 타고 마당에 나가 저수지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오리들을 바라본다.

열네 살 통영의 전현이가 어느새 여든여덟 살 노인이 되어 있었다.

인생을 돌아보면, 세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여인이 나의 삶을 스쳐 갔다.


세월은 무상하다더니, 살아온 날들이 후회스럽지는 않지만 어쩐지 아쉽다.

특히 아이들에게 좀 더 온화하고 다정한 아버지로 남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제 남은 날이 얼마 없음을 안다.

다행히 치매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수많은 지난날의 기억을 선명하게 품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사랑했던 여자들,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여인까지.


얼마 전, 나는 수아에게 J전자 주식 500억을 주었다.

내 생애 마지막 선물. 그리고 그것은 수아가 내게 처음으로 직접 부탁한 것이었다.


이제는 집착도 질투도 사라졌다. 너무 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도 비서실장은 장남과 둘째가 다투었다는 보고를 했다.

귀가 닳도록 들어온 이야기다.

이제는 듣기도 지겹다. 내가 죽고 나면 그 피의 싸움은 상상하기도 끔찍하다.


장남은 그룹 회장이 될 자리에 있고, 둘째는 그 자리를 탐내고 있다.

수없이 타일렀지만, 권력과 돈 앞에서 내 말은 늘 무력했다.



막내딸은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찾아와 나를 위로한다.

그러나 수아는 그녀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집을 비운다.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다.



#장남의 독백

나는 장남으로서 당연히 회장 자리를 이어받아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니라 하신다면 받아들이겠다.



#둘째 아들의 독백


형보다 능력은 내가 우월하다.

회장 자리를 장남에게 준다면, 회사는 곧 무너질 것이다.

내가 회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회사가 산다.


#막내딸의 독백

사람들은 나를 천사라 부른다.

나는 수녀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존재라 생각한다.



#수아의 독백

막내딸은 외모는 천사 같지만, 그 안에는 사악한 악마가 숨어 있다.

나는 그녀의 눈빛 속에 늘 음습한 그림자를 본다.






이제는 내 몸이 움직일 수 있을 때 상속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동시에 두렵다.

그 순간부터는 형제들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 시계는 열 시를 넘겼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은 오지 않는다.



그때 문이 열리고 수아가 잠옷 차림으로 내 곁에 다가왔다.





“오늘은 회장님 옆에서 자고 싶어요.”


나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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