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작은백합

#피보다 강한 의심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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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여름, 나는 당시 야당 대표 박을 만났다.


어릴 적 청와대에서 몇 차례 스친 기억은 있었지만,

정치에 입문한 그녀와 단둘이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막 당사 이후 급부상한 리더십 덕에 세상은 그녀를 ‘차기 대권주자’라 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그녀와 나 사이에는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긴장이 공존했다.



“회장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거실로 들어선 그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나는 텔레비전으로 매일 네 얼굴을 보고 있지.”



스무 살 넘는 나이 차가 무색할 만큼 대화는 차분히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본론이 나왔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내 계열사 직원과 가족만 해도 수백만, 내가 후원하는 종교의 신도는 헤아릴 수 없었다.



결국 정치에서 가장 필요한 건 돈이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내 나이가 여든을 넘었다. 더는 직접 뛸 수 없다.
네가 당선된다면, 내 아들이 회사를 무사히 운영할 수 있도록 5년만 지켜주어라.

이번 선거엔, 나는 너만 돕겠다. 상대 진영엔 단 한 푼도 가지 않으리라.”



그녀는 순간 무릎을 꿇었다. 고개 숙여 손을 모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날 밤, 비 내리는 정원을 수아와 함께 바라보았다.
이 웅장한 집은 이제 곧 비워야 했다.



내 땅 20만 평이 수용되고, 이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새로 짓는 호숫가 단층집에서 수아와 단둘이 조용히 살 작정이었다.
우리만의 공간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예기치 못한 일이 터졌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이 국도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
들이받은 차량은 그대로 도주했고, 아들의 차는 저수지에 빠졌다.



기사는 탈출했지만, 아들은 물에 잠긴 뒤 가까스로 살아 나왔다.
차가운 물 속에서 기적처럼 생존한 것이다.



청장이 보고를 하러왔다.


“도주 차량은 강으로 빠뜨린 뒤 운전자가 달아난 것으로 보입니다.

운전자는 신원 확인이 어렵습니다.”



게다가 아들 운전기사가 중국으로 출국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나는 직감했다.

누군가 내부에서 아들 동선을 넘겼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는 세 아이들의 계좌를 뒤졌다.

회사 돈이 새어 나간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큰아들이 죽는다면, 가장 이득을 보는 건 누구인가?’
둘째 아들과 막내딸…



핏줄이라 믿고 싶었지만,

피가 다르다는 사실이 불길한 의심으로 번져갔다.



그 의심은 마음속에서 잠시도 쉬지 않았다.

나는 내 아들들을 의심하면서도,

아버지로서 그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렸다.



수아가 내 곁에 와서 속삭였다.


“회장님, 다 잊어버리세요. 생각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 않습니까.”



나는 테라스에서 장마비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고향 통영을 떠올렸다.



그때 수아가 내 발을 주무르며 웃었다.

“몸이 가벼워지셨죠?”



그 말에 잠시 마음이 누그러졌다.

나는 그제야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세 아이들이 불타는 초가집 안에서 서로 밀치며 밖으로 나가려 발버둥쳤다.

“아들아!”
외치며 몸부림치다 눈을 떴을 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아가 다가와 조용히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쁜 꿈 꾸셨군요. 오늘은 제가 곁에서 꼭 안아드리고 주무시게 해드릴게요.”



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간, 세상 근심이 사라졌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방으로 이끌었다.



그날 밤, 단 1g의 근심의 무게도 남지 않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

새벽녘,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나는 더 세게, 더 깊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불안과 의심이 언젠가 나를 집어삼킬 불씨가 되리라는 것을 .....
그러나 지금은 그저 잠시라도 안식을 느끼는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공사 중인 새집 구경을 갔다.



이곳은 내가 맞이할 노년의 집,

아니 어쩌면 내 죽음을 맞이할 집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수아에게 말했다.

“수아야, 우리에게는 여기서 살 행복한 집이야.”



도착했을 때,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수아가 내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회장님, 우리 행복하게 여기서 살아요. 동물들도 키우고…”



나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응, 그러자.”

저수지는 내 땅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오리들을 풀어 놓고,

가볍게 물가를 거니는 모습을 그렸다.



조만간 우리는 이곳으로 이사할 것이다.
아름다운 그녀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꿈처럼 행복했다.



무더운 여름,

그녀의 피부에서 흐르는 땀의 감촉조차 나에게는 황홀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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