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작은백합

#영원히 머물고 싶은 순간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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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8년 3월.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1965년 일본에서 돌아와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던 시절부터 그와 인연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의 힘을 등에 업고 힘차게 시작하는 순간이였고,

그는 겨우 건설회사의 말단사원이었다.



20년이 지나 그는 건설사 회장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그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다.


갑과 을로 엮인 두 사람,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꼭 나뿐사이는 아니였다.



새 정부의 방향은 분명했다. 기업 규제와 감사.

털면 먼지가 나오는 세상, 비자금도, 주식 담합도,

공사 수주도 모두 덮어놓을 수 없는 시대가 왔다.



큰 아들은 전자회사 부회장, 둘째는 건설사 이사.

막내딸은 아직 수녀복을 입으며 세상과 거리를 두려 했다.



아이들은 이미 재산과 경영에 눈을 떴고,

형제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금이 가고 있었다.



그때, 수아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1년간 아파트에 살다가 돌아온 그녀는 마치 운명처럼 내 곁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 눈에는 또 하나의 가족이었겠지만, 내 눈에는 달랐다.

그녀는 내 삶의 빈 공간을 메워주는 빛이었다.



2008년 7월의 어느 토요일.

온 가족이 모여 수영장에서 물놀이와 바베큐를 즐기던 날.

큰아들은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여자를 데려왔다.

여자 세명이 모두 비키를 입고 있었다.

그 옆에서 수아는 붉은 비키니 차림으로 웃고 있었다.


태양빛이 물결 위에서 반짝일 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의 시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수아에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10월 말, 낙엽이 흩날리는 집 근처 작은 산길을 수아와 걸었다.

그녀의 손은 가늘었지만, 내 손을 꼭 잡아주는 그 온기는 세상의 어떤 힘보다 따뜻했다.



“회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이 검찰 출두일임에도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나는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응, 그래. 검찰쯤이야. 하지만… 너 없이는 못 견딜 것 같다.”



그 순간 벤치에 앉은 수아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나는 속삭였다.



“너가 있어서, 내가 아직 살아있다.”

수아는 눈을 붉히며 대답했다.




“목포의 가난한 촌년을 이렇게 높은 자리까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도 회장님 덕분에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걸 배웠어요.”




그녀의 말은 내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

나는 78세의 노인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소년처럼 가슴이 뛰었다.




수아는 단순한 비서도, 동거인도 아닌,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회장의 애첩”이라 불렀지만,

내 눈에는 그녀는 이미 다섯 번째 아내였고, 아이들도 인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 곁에서 점점 더 강해졌다.

회사 안에서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주식과 부동산을 넘겼다.

내 사후, 자식들이 그녀를 두고 다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그녀와 함께라면, 남은 시간은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이다.



다음 날, 나는 고령임에도 휠체어를 거부하고 당당히 걸어 검찰청에 들어섰다.



청와대와 이미 조율된 자리였다.

“추징금으로 마무리하자.”는 말, 그리고 검찰총장과의 악수로 마무리했다.




그 모든 정치적 거래의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오직 수아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만약 오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은 그녀였다.




그날 저녁,

방 안에는 수아의 샤워 소리만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증기 속에서 번지는 물방울 냄새와 따스한 습기가 공기 중에 감돌았다.

나는 불을 끄고, 그녀가 나오는 순간을 기다렸다.



문틈 사이로 비친 그녀의 실루엣.

가늘고 단아한 허리, 젖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향.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숨조차 참아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다가오자 나는 손을 뻗어 부드럽게 그녀를 안았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은 사라졌다.



“권력도, 재산도, 세상도 필요 없다…

오직 너, 수아의 마음만 내 안에 있다면 된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온기, 떨림, 그리고 설렘.



“나의 마지막 사랑, 나의 전부… 나의 영원한 수아.”

두 사람 사이로 흐르는 정적 속에서....

그 순간만큼은 세상 어느 것도, 그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소원한다, 이것이 노년의 집착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소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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